[청사초롱-최연하] 세상 모든 알바트로스에게 기사의 사진
황현산 선생이 옮긴 보들레르의 시 ‘알바트로스’는 날아야 하지만 날개를 꺾인 채 지상에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시인의 삶을 비유하고 있다. 이 시에서 뱃사람들이 붙잡은 알바트로스가 갑판 위에서 크고 흰 날개를 질질 끌면서 무력하게 놀림 당하고 있는 모습은 세속의 도시 한복판에서 역할을 할 수 없는 시인의 무능함과 오버랩된다. 알바트로스의 날개는 길이가 3~4m여서 높고 거침없는 이상의 상징으로, 보들레르의 시에서처럼 ‘폭풍 속을 드나들고 사수(射手)를 비웃는 구름 위의 왕자’로 불린다. 하지만 지상에서는 긴 날개를 감당하지 못해 뒤뚱대며 걷는 모습이 바보 같다고 하여 ‘바보 새’로 통하기도 한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서식지 현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현실을 뚜렷하게 반영하는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상징을 구현한다. ‘알바트로스’를 쓸 당시 보들레르는 인도 캘커타로 떠나는 선상에서 문학을 향한 열정과 현실의 괴리감으로 심한 우울에 빠지고, 급기야는 날개가 꺾인 슬픈 알바트로스의 모습에 자신의 상황을 투영한다. 자유롭게 활공하고 싶어도 날지 못하는, 현실에서 낙오한 작가의 상징이 알바트로스인 것이다. 보들레르를 읽다보면 서구의 근대를 지탱했던 이분법을 부정하는 몸짓들이 보인다. 인간과 환경, 주체와 객체, 정신과 육체 등 주변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획일화시키며 고정된 경계선으로 구분 짓기를 포기하는 듯하다. 대신 이질적이고 낯선 감각들의 조응을 통해 비가시적 세계의 본질에 닿으려고 한다. 그의 작품은 세상을 뚜렷하게 직시하고 관찰한 결과물들이 직조된 것이다.

진정한 리얼리티를 예술 창작의 목표로 추구하는 작가는 보들레르 이후에도 말라르메와 랭보 등 상징주의 시인들로 이어진다. 최근 내한한 크리스 조던의 작품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태평양의 미드웨이 섬에서 수천 마리의 죽은 새끼 알바트로스를 발견한 그는 알바트로스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마치 인류학자처럼 관찰한다.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뜻밖에도 부모 새가 먹이로 가져다 준 플라스틱이었다. 부모 알바트로스가 바다 위로 떠다니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먹이로 착각한 것이다. 죽은 새의 뱃속에는 플라스틱 조각들이 가득 차 있었다. 작가는 무릎을 꿇고 사체를 내려다보며 마치 ‘섬뜩한 죽음의 거울’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문명화된 인간들이 알바트로스처럼 ‘인류를 풍요롭게 하는 것과 인류의 삶과 정신에 유해한 것을 분별하는 능력을 서서히 상실해가고 있다’고 말하며 깊은 애도에 잠긴다.

‘구름 위의 왕자, 바보 새, 저주받은 시인’이라는 상징을 가진 알바트로스에게 새 이름이 생겼다. 바로 ‘플라스틱 새’라는 것. 사람들은 미세먼지 때문에 산책을 나서지 못하고, 운동장은 텅 비었고, 도정일 선생의 언급처럼 ‘시인들은 숲으로 가지 못하고’, 알바트로스는 날지 못한다. 이 시대 수많은 예술가들이 인간중심적 가치관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며 생명세계의 의의에 대한 공감을 유도하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그들은 인류와 환경의 건강한 존속을 지향하고 상상력을 통해 예술 본연의 기능을 깊이 있게 추구한다. 때론 보이는 세계 너머의 본질을 드러내고, 상처와 고통의 현장에 오래 깊이 머문다.

예술에서 상상력은 현실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자 다른 세계와의 색다른 관계망을 형성하는 마법이다. 보들레르와 크리스 조던이 조우한 알바트로스는 생명 네트워크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거나 희미해져 문명의 발달사가 곧장 자연의 타락사가 되는 이 시대의 강력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세계 곳곳에 있는 알바트로스들을 생각하며 일상의 상상력을 깨워 모든 생명들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려보는 것만으로 삶이 더욱 생생해질 수 있다. 하나의 고리가 떨어지면 모두 해체될 수 있음을 알고, 모든 나무와 동물과 바다와 하늘과 꽃과 물고기의 말들에 귀 기울이는 것. 보들레르는 인도로 가는 선상에서 인류의 시원이자 고향인 바다를 보며 생각하지 않았을까.

최연하 사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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