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김철오] 친일파 홍사익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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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홍사익.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전쟁에 가담한 B급 전범이다. 태평양전쟁 종전 이듬해인 1946년 9월 26일 필리핀 마닐라 전범수용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1966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고,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작성한 705명의 친일파 명단에 들어갔다.

홍사익은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군인이었다. 일제강점기 35년간 일본 육군대학에 입학한 조선인은 단 4명. 그중 3명은 영친왕을 포함한 왕족이었다. 실력만으로 합격한 조선인은 사실상 홍사익밖에 없었다. 홍사익은 1944년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 남방총군에서 장성급 장교인 중장까지 진급했다. 육군대학 졸업생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다. 홍사익은 1887년 경기도 안성에서 몰락한 양반가문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 20여년 터울의 맏형 손에 자라면서 과거 급제를 꿈꿨다. 과거 제도의 폐지로 꿈이 꺾이자 대한제국의 군인이 됐고, 군이 일제에 의해 해산되고 떠난 일본 유학길에서 그대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홍사익이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위관급 장교로 임관됐던 1909년은 한반도가 일제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했던 해다.

일본 평론가 야마모토 시치헤이의 저서 ‘홍사익 중장의 처형’을 보면, 홍사익은 다소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물이었다. 국운이 기울어진 상황에서 그가 추구한 출세의 길은 제국주의에 대한 부역이었지만, 창씨개명에 동참하거나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공직자로만 놓고 보면 일처리가 탁월했으며 이문에 밝지 않아 축재하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다.

야마모토는 전범에 대한 연합국의 재판기록을 샅샅이 뒤져 ‘조선인 홍사익’의 삶을 추적했다. 야마모토 역시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 남방총군 소속이었다. 그의 저서에 따르면 홍사익은 이름을 일본식인 ‘고시요쿠’로 독음할 때도 있었지만 개명한 적은 없었다. 군에서 지휘관으로 파견돼 취임사를 할 때마다 일본어로 먼저 인사한 뒤 “나는 조선인 홍사익이다”라고 우리말로 다시 인사했다고 한다.

일본 육군 대위였던 1925년 전후, 학교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멸시를 당해 괴로워하는 아들 홍국선과 나눈 대화는 주목할 만하다. 홍사익은 당시 독립을 선언했지만 영연방에서 탈퇴하지 못한 아일랜드의 사례를 들어 “아일랜드인은 영국에서 어떤 일을 당해도 아일랜드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조선인 홍국선입니다’라고 말하라. 조선인이라는 말을 생략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독립군 사령관이 된 일본 육사 동기 지청천으로부터 은밀하게 합류를 권유받았을 때 거절했던 이유는 일제에 대한 충성심보다 조선에서 강제로 동원된 군인·노동자의 안위를 걱정해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정황들을 펼쳐놓으면, 홍사익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조국의 독립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제국주의의 광풍에 휩싸인 일본에서 조선인의 권리를 주장할 방법을 모색한 인물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하지만 변명이 될 수 없다. 눈앞의 현실을 택한 내면의 갈등과 시대의 불가항력은 반민족행위와 전쟁범죄를 사면하지 않는다. 홍사익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중국으로 파견돼 일제의 침략전쟁에 가담했고, 다시 배속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추적했다. 필리핀에서 벌어진 연합군에 대한 살해·학대는 포로수용소장인 홍사익의 죄목이 됐다.

홍사익은 전범재판소에서 다가오는 운명을 이미 간파했다. 변론하지 않고 사형 선고를 받아들여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지금에 이르러 홍사익을 놓고 다양한 평가가 나오지만, 그가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홍사익은 용서를 구할 기회도 구하지 않았다. 용서는 참회와 사과가 있을 때 가능하다. 피해자의 관용은 별개의 일이지만.

100년 전 ‘독립 만세’의 함성이 한반도를 뒤덮었다. 1919년 3·1운동은 지금의 우리를 독립국가의 주권자로 살아가게 해준 존재의 이유가 됐다. 3·1운동을 계기로 한반도 지배의 방식을 문화통치로 전환한 일제의 기만에 일부 독립운동가가 변절했고 친일파가 속출했지만, 이 틈에도 신념을 지킨 애국자는 많았다. 홍사익은 그해 일본 육군의 최고 요직인 인사국에 있었다.

김철오 온라인뉴스부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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