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토 빼앗겼는데 외면하면 더 큰 죄”… 기도 응답받고 독립선언서에 서명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4) 수표교교회와 신석구 목사

“강토 빼앗겼는데 외면하면 더 큰 죄”… 기도 응답받고 독립선언서에 서명 기사의 사진
김진홍 서울 수표교교회 담임목사가 지난 20일 이 교회 역사 전시 공간에 전시돼 있는 신석구 목사의 사료를 가리키며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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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중 한 명인 은재 신석구(1875~1950) 목사는 교회만 돌보던 목회자였다. 그런 그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건 기도의 결과였다. 신앙고백의 연장선상이었던 셈이다. 보름 가까이 했던 기도는 그를 독립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서울 수표교교회에서 목회하던 신 목사의 비범한 성품을 알고 있던 오화영 종교교회 목사가 1919년 2월 민족대표에 참여하자고 제안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신 목사는 즉답하지 않았다. 대신 기도를 시작했다. 가장 목사다운 방법으로 답을 찾았다.

“아무리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 해도 목사가 정치에 참여하는 게 옳은가” “목사로서 다른 신조를 가진 종교인들과 연합하는 게 맞는가”. 기도 제목은 이 두 가지였다. 2월 27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수천년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서 빼앗긴 것도 죄인데 이제 기회가 왔는데도 외면하면 더 큰 죄가 아닌가.” 응답을 받은 신 목사는 민족대표 중 서른세 번째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던 신 목사의 정신이 남아있는 수표교교회를 지난 20일 방문했다. 서울 중구에 있던 교회는 1984년 서초구 명달로로 이전했다. 담임 김진홍 목사는 기자를 본당 지하의 역사 전시 공간으로 안내했다. 교회학교로 향하는 통로에 마련된 공간에선 수표교교회가 지켜온 신앙의 정신이 느껴졌다. “신석구 목사님뿐 아닙니다. 오화영 목사와 정춘수 목사가 모두 수표교교회 담임목사였습니다. 3명의 민족대표가 거쳐 간 흔치 않은 교회죠. 훗날 정 목사가 변절해 친일파로 돌아선 게 큰 아픔입니다.”

1918년 부임한 신 목사는 민족대표가 된 뒤 투옥되면서 사임했다. 오 목사는 1927년부터 이듬해까지 사역했다. 정 목사는 1935년 부임한 뒤 1936년 임지를 옮겼다. 목회자들의 임기가 짧았던 건 당시 감리회가 ‘목사 파송제’를 정확하게 지켰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총회의 명령에 따라 임지를 자주 옮긴 것이다.

수표교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던 중 독립운동에 참여한 신 목사가 남긴 유산은 도드라진다.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한 신 목사는 여러 반대에 부딪혔다. “목사님이 서명하고 선언서 외친다고 독립이 됩니까” 하는 우려가 많았다. 신 목사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독립의 열매를 맛보려는 게 아니다. 심을 뿐이다. 내 자식들 마음에 ‘우리 아버지는 독립을 위해 일하셨다’는 마음만 심어도 성공이라 여길 것이다.”

결국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2년 8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형무소에서의 삶은 가혹했다. 재판 중 검사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조선이 독립될 줄로 생각하는가, 출소 뒤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신 목사는 “독립은 될 줄로 생각하며 그날까지 헌신할 것이오”라고 답했다.

출소 뒤 그는 일장기 게양과 태평양전쟁 전승 기원 예배, 신사참배 등을 거부하며 일제에 맞섰다. 충청도와 강원도, 황해도 등 부임하는 곳마다 일제에 반기를 들었고 번번이 재판을 받은 뒤 투옥됐다.

모든 결단은 고결했던 신앙과 맞닿아 있었다. 마지막 모습도 그랬다. 해방 후 북한에서 사역하던 신 목사에게 남한으로 탈출하자는 제안이 많이 들어왔다. 그때마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 땅에 남은 양들을 이리떼 같은 공산당에 맡기고 어찌 이남으로 갈 수 있느냐”.

공산당은 그에게 ‘진남포 사건’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씌워 1949년 4월 19일 평양형무소에 가둔다. 공산당은 신 목사를 끈질기게 회유했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1950년 10월 10일 후퇴하던 공산군은 그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시신은 형무소 우물에 던져 버렸다.

강압에 저항했던 신 목사의 삶은 신앙 후배들에게 귀감이 된다. 모든 결정에 앞서 기도하라는 것, 기도의 답을 받았다면 절대 흔들리지 말라는 등의 교훈은 후대에 남긴 신앙 유산이다. 그의 신앙적 결단은 변절한 목회자들의 굴절된 삶과 비교되면서 더욱 빛을 발한다. 정부도 1961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유해 없이 신 목사를 안장했다. 1963년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며 그의 올곧은 정신을 기렸다.

그는 1950년 별세했지만 그의 정신은 수표교교회를 통해 되살아나고 있다. 김 목사는 “신 목사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은 신앙인의 삶이 가야 할 방향”이라면서 “신앙 위에 선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나보다는 이웃을 먼저 생각하면서 ‘우리’라는 공동체성을 회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이것이야말로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신앙인의 바른 자세”라고 덧붙였다.

교회는 1일 신 목사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 칸타타 ‘주를 위해’를 무대에 올린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10일 이탈리아 로마연합교회, 13일 독일 베를린 선한목자교회에서도 연합 공연을 한다.

글·사진=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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