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남진 (13)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화려한 부활

군복무 2년 공백 깨고 인기 질주… 프레슬리 공연 보고 감동, 같은 창법으로 ‘임과 함께’ 불러

[역경의 열매] 남진 (13)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화려한 부활 기사의 사진
남진 장로가 1973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복장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남 장로는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렸다.
1971년 4월 12일 베트남에서 귀국해 6월에 제대했다. 연예인에게 2년의 공백은 긴 시간이다. 게다가 참전용사로 베트남에 있었으니 세월의 변화가 느껴졌다. 귀국하니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나훈아는 나의 파트너였던 작곡가 박춘석과 손을 잡고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듬해 나훈아가 부른 ‘물레방아 도는데’(박춘석 작곡)는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공백에 대한 우려는 기우였다.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귀국 기념 공연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MBC는 입대 전 내가 부른 ‘마음이 고와야지’를 71년 최고 인기가요로 선정했다. 이후 ‘임과 함께’ ‘그대여 변치마오’까지 3년 연속 인기가요상을 받았다. 가수로서 최고 영예인 MBC 인기가수상도 71년부터 3년을 내리 수상했다. TBC 남자가수 대상은 71년과 73년에 받았다. 72년에는 나훈아가 받았다.

당시 언론은 나를 두고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 불렀다. 1935년생인 프레슬리는 나보다 나이는 한참 위이지만 춤을 추는 가수이자 영화배우인 점이 같았다. 그는 로큰롤이 기성세대로부터 지탄을 받자 자원입대까지 했다. 애국자 이미지로 쇄신한 것이다. 그의 곡 ‘GI Blues(군인 블루스)’는 영화로까지 제작됐다. 나도 그 곡을 번역해 불렀다.

72년 지인의 소개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프레슬리의 쇼를 보았을 때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쇼였다. 지금도 그때 쇼의 수준을 따라 하지 못한다. 음악 무대매너 액션 어느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가 닮고 싶어서였을까. 프레슬리 스타일의 옷을 입고 그의 로큰롤 스타일로 노래를 불렀다. 1973년 하와이 공연 때는 프레슬리의 매니저로부터 직접 그가 입은 점프슈트를 구해오기도 했다. 그의 레코드판만 1000번을 넘게 들었다.

프레슬리는 자신이 부른 히트곡이 많았는데도 다른 이의 곡을 부르는 리바이벌 쇼(Revival Show)를 자주 했다.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 ‘아이 캔트 스톱 러빙 유(I can't stop loving you)’ 등의 노래를 곧잘 불렀다. 원곡 그대로 부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스타일로 편곡하고 색깔을 입혀 맛깔나게 불렀다.

지금도 한국에선 리바이벌 쇼라는 개념이 거의 없다. 텔레비전 예능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의 노래를 편곡해 다시 부르는 일이 거의 없다. 일본만 해도 리바이벌해 부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우리는 다른 이의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원곡과 비슷하게 불렀는지 아닌지 비판하려 든다. ‘왜 이렇게 꼴값을 떠느냐’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원곡에서 느낄 수 없는 편곡의 맛이란 게 있다. 비틀스의 노래를 여성이 부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프레슬리가 비틀스의 ‘섬싱(Something)’을 편곡해 부른 노래를 들어보면 그 맛을 알 수 있다. 끝내주게 좋은 곡이다.

‘임과 함께’는 프레슬리의 창법으로 부른 대표곡이다. 강약을 넣어 ‘저 푸른 초원 위에’를 불러보면 알 수 있다. 프레슬리의 창법 그대로다. 내 데뷔곡인 ‘서울 푸레이보이’도 프레슬리 창법이나 다름없다. 내가 부른 노래 대부분이 그의 창법에 젖어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들어도 내 노래가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세월이 흘러도 인정받는 로큰롤의 매력 때문이 아닐까.

정리=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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