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있다. 서로 알지 못하고 알게 될 기회 없이 한 학기 동안 공부하고 시험을 쳤다. 채점이 끝났지만 결과가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학생들은 회의를 통해 각자 받을 점수를 정할 수 있다고 안내를 받는다. 조건은 회의에서 정한 점수들의 합계가 채점된 점수들의 합계와 같다는 것뿐이다. 물론 폭행이나 협박, 위력 행사는 허용되지 않는다. 학생들이 회의하기 위해 모이고 논의에 들어간다. 어렵지 않게 결론이 난다. 모두 똑같이 평균 점수만큼씩 받기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회의 다음날 ‘받을 권리가 있는 점수’라는 제목으로 채점 결과가 공지된다. 비록 권리라고 명시되었지만 채점 결과는 학생들의 동의를 받지 못한다. 평균 점수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학생들이 채점 결과 수용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분배의 정의에 대한 철학으로 20세기에 손꼽히는 학자인 로버트 노직이 1974년 저서 ‘무정부, 국가, 유토피아’에 쓴 사례다. 노직은 3년 전인 1971년 출간된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하며 이 사례를 들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존 롤스는 역시 걸출한 학자로서,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서조차 모르는 가상적인 원초적 상태에서 분배에 대한 합의를 본다면 사회의 최약자가 가능한 한 행복해지도록 결론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내가 최약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성적으로 그러한 합의가 도출될 것이라면 현실에서도 사회적 약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정의롭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노직은 롤스의 주장이 똑같은 점수를 나눠 갖기로 한 회의 결과와 다를 바 없다고 반박했다. 점수를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처럼 취급하지 않고서야 약자만 유리한 분배 규칙이 나올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건 정의가 아니라는 노직의 사례가 직관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것은 시험으로 고생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적이란 노력 없이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점수 합계 자체가 분배 규칙에 따라 다를 것이 분명하다. 시험을 친 후가 아니라 학기 초에 분배 규칙을 정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점수를 똑같이 나눠 받기로 하면 점수 합계가 크게 떨어질 것이고, 노력하여 차별화된 성과를 내고자 하는 사람은 애초에 균등한 분배 규칙에 반대할 것이다. 이렇게 균등한 분배가 반드시 모두가 합의할 만한 정의로운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명쾌해 보이는데도 우리 사회는 균등한 분배를 정의롭게 보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불평등에 대한 불만으로 몸살을 앓는 중이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첫째, 스스로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아졌다. 미국이나 유럽은 금융위기와 재정위기가 기폭제가 됐다. 우리나라는 그러한 결정적 계기는 없었지만 경제 성장이 정체한 것이 중요한 요인이다.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중이 커지면 균등한 분배는 정치적으로 지지받게 마련이다. 문제는 균등한 분배가 단기 처방은 될지 몰라도 지속되면 점수 합계를 크게 떨어뜨리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둘째, 우리 사회는 현재 성과의 분배 과정에 대한 신뢰가 낮다. 노직의 사례가 와닿는 것은 우리가 채점에 대한 신뢰를 암묵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노직은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 정당했다면 결과를 바꿀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고 주장했지만, 과정이 정당하지 않았다면 결과를 바꾸려는 시도를 비판할 수 없게 된다. 이번 정부는 과정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 공이 있다. 공정한 사회를 향한 정부의 노력이 하나하나 다 바람직한 길로만 가고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예전과 다르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 같다. 공정한 과정을 정착시키는 험한 길은 계속 걸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미덕으로서 옳다. 다만 이쯤에서는 균등한 분배보다 능력 있고 노력하는 사람이 합당한 결과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정의라고 속 시원히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민세진(동국대 교수·경제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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