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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 기자 성기철의 수다] 태극기는 죄가 없다


국기에 얽힌 아련한 추억 많아 극우세력 홍보 도구 전락 곤란
좌파들의 외면 역시 불행한 일 국가 상징 의미 훼손 말았으면


나에겐 대학생이 될 때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은 박정희 한 사람뿐이었다. 태어난 지 꼭 1년 됐을 때 그는 군사 쿠데타로 집권해 무려 18년 동안 권좌를 지켰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박 대통령이 제정했다는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했고, 6학년 때 10월 유신이 단행됐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음’(국민교육헌장 첫 문장)을 명심해야 했으며,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유신의 명분)를 위해 자유민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일정 부분 포기하고 살아야 했다.

사실상 전체주의 체제였던 그 시절을 회고하면 태극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시골집 안방에 1년 내내 붙어 있었던 한 장짜리 달력 상단에는 태극기와 대통령 얼굴이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민주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이 준 홍보 달력이다. 초등학생들은 동네별로 줄을 서서 ‘월남 군가’를 부르며 등교했는데, 어김없이 태극기를 높이 든 고학년 기수가 앞장을 섰다. 중고교 시절 수시로 동원된 반공 궐기대회나 귀순용사 연설회장은 항시 태극기 물결이었다. 문화교실이란 이름으로 단체 극장 관람을 가도 애국가와 함께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해야 했다.

그 시절 태극기에 대한 가장 선명한 기억은 국기 게양식과 하강식이다. 학교, 동사무소를 비롯한 공공기관과 큰 건물을 가진 기업체 등에서 매일 아침저녁 게양식과 하강식 행사가 열렸다. 행사 참석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인근 길 가던 사람도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국기게양대를 향해 부동자세로 가슴에 손을 얹어야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축구나 고무줄놀이를 하던 초등학생,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고교생, 종종걸음으로 장보러 가던 아낙네도 무조건 ‘동작 그만’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태극기는 애국가, 무궁화와 함께 대표적 국가 상징이다.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함에 틀림없다. 1882년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박영효 일행에 의해 최초로 사용된 태극기. 100년 전 3·1만세운동을 계기로 처음 전체 국민에게 나라사랑의 상징물로 자리매김했다. 8·15광복절엔 삼천리 방방곡곡 온 국민의 손에 들렸다.

군 출신 박정희정부 들어서 태극기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국론 통일의 정책 수단으로 이용됐다. 굳이 나쁘다고 할 순 없다. 정부가, 대통령이 국가 상징을 활용해 국민의 마음을 한데 모으겠다는 걸 함부로 비판하기는 쉽지 않다. 매사 과유불급이라고, 너무 지나친 데다 악용됐다는 게 문제다. 박 대통령 시해 사건 때 함께 살해된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의 무소불위 행태가 대표적 악용 사례다. 그는 장관이나 차관, 국회의원 등 정관계 고위직과 대학교수 등 저명 인사들을 수시로 경호실 하강식에 참석시켰다. 당시 끌려나오다시피 강제로 참석했던 한 인사는 “그 후 태극기가 꼴도 보기 싫어졌다”고 증언한 바 있다. 태극기가 무슨 죄라고….

태극기는 김영삼정부 때 잠시 모멸을 겪어야 했다. 정부가 국기 국가 국화의 교체, 혹은 수정 여부를 논의한 것. 태극기는 그리기가 너무 어렵고, 애국가는 너무 느려 힘이 없고, 무궁화는 피고 지는 모습에 역동성이 너무 없다는 지적을 받아서다. 총무처에 국가상징위원회를 설치해 구체적으로 대책을 논의하기까지 했다. 역사성을 경시한 단견이라는 여론이 높아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자칫 태극기가 나라 깃발로서의 자격을 상실할 뻔했다.

성기철 경영전략실장 겸 논설위원

태극기는 2002년 한일월드컵대회 때 화려하게 부활했다. 온 국민이 붉은악마로 변신해 전국 방방곡곡이 태극기 물결에 휩싸였다. 2년 뒤엔 장동건과 원빈이 주연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1100만 관객을 동원하며 공전의 히트를 쳤다. 정부나 권력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태극기가 무얼 뜻하는지, 나라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많은 사람의 가슴에 아로새기게 했다.

그런 태극기가 언젠가부터 특정 정치세력의 홍보 도구로 전락한 느낌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를 계기로 등장한 태극기 부대가 그것이다. 박 전 대통령 석방을 주장하는 집회,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는 행사장엔 어김없이 태극기가 나부낀다. 어느새 극우세력의 상징물이 돼버린 느낌이다. 태극기 집회가 열리는 서울역이나 광화문광장에 가보시라. 구호에 악이 받쳐 있다. “문-재-인 빨-갱-이, 박-근-혜 대-통-령.” 이들의 목소리는 급기야 지난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무려 137년의 역사를 가진 태극기는 함부로 그 존재 의미를 폄훼할 수 없는 국가 상징이다. 국가권력이든, 야당이든, 민간 결사체든 그것을 활용하고 이용하는 것은 자유다. 걱정스러운 것은 태극기의 국가 상징 이미지가 훼손될 수 있다는 점이다. 소수 극우세력의 상징물로 고착되는 것은 불행이다. 반사작용으로 소위 진보세력이 태극기를 노골적으로 멀리하는 것은 또 다른 불행이다. 어떤 경우에도 태극기는 우리 국민 모두의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집에선 국경일에도 애써 태극기를 달지 않았다. 식구가 다섯이나 됨에도 앞장서서 달자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잊어버렸거나 게을러서다. 며칠 전 3·1절 아침에는 작심하고 태극기를 달아봤다. 몸담고 있는 신문사에서 3·1절 100주년 기념 기획 기사를 내보내고 있으니 최소한 태극기라도 달아 동참해야지 싶어서였다. 그런데 뭔가 기분이 찜찜했음은 왜일까. 아마도 태극기 부대가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나만의 느낌일까. 하긴 내가 태극기 부대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 편이긴 하다.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어쨌든 안타까운 일이다. 태극기 하면 나라사랑, 3·1절, 광복절이 가장 먼저 생각나야 할 텐데….

성기철 경영전략실장 겸 논설위원 kcs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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