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해방과 전쟁 사이, 양을 지키다 희생된 목자

송창근 목사와 서울 동자동 서울성남교회

서울역 앞 동자동 서울성남교회 석조예배당. 쪽방촌이었던 이 지역은 교회만 남기고 대형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석조건물은 기독교 유산으로 보존됐다. 사진 오른쪽 은행나무는 석조예배당을 건립하면서 심었다.

서울역을 나서면 왼쪽 숭례문 방향으로 세브란스빌딩이 보인다. 이 일대가 일제 강점기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연세대 의대 전신)였고 그 부속 교회가 지금의 남대문교회다. 남대문교회 석조예배당은 서울스퀘어(옛 대우빌딩)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용산 방향으로 눈을 들면 ‘서울성남교회’라는 현대식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 현대식 건물은 아담한 규모의 서울성남교회(허정강 목사) 석조예배당의 부속 공간이다. 북으로 남대문교회, 남으로 서울성남교회 석조예배당인 셈이다.

크리스천이라 하더라도 서울성남교회를 무심히 지난다. 한데 이 교회는 해방과 6·25전쟁 시기를 이겨내며 신앙의 연대를 쌓은 유서 깊은 공간이다. 보존되어야 할 기독교 문화유산이다. 다행히 서울성남교회가 석조예배당의 역사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 신앙의 연대 중심에는 만우 송창근 목사가 있다.

지난 3일 주일. 본교회 2부 예배를 마치고 서울성남교회를 두 번째 방문했다. 허기가 져 교회 옆 간판도 없는 수제빗집에 들어갔다. 일본식 가옥처럼 보이는 스러져 가는 집 귀퉁이 일부를 쓰고 있었다. 60대 여주인은 30대부터 서울역 부근에서 철거반에 쫓겨 다니며 포장마차를 운영해 자식을 키웠다고 했다. 여주인은 “교회에 나가고 싶은데 잘 몰라서…”라고 했다. 그가 무속을 믿다 뒤늦게 예수를 믿은 어머니 얘기를 털어놨다. 돌아오던 길에 서울성남교회 측에 이 아주머니의 교회 출석 뜻을 전했다. 어느 교회에 출석하든 관계없을 것이다.

송창근 목사 (1898~1950)

서울성남교회는 1945년 성 바울전도교회라는 이름으로 송창근 목사가 설립했다. 송창근은 함북 경흥 출신으로 간도 명동소학교와 명동중학을 다녔다. 교장이 독립운동가 이동휘였고 그로부터 목사가 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는 서울 피어선성경학원을 졸업하고 남대문교회 조사(전도사)로 부임했다. 함태영(부통령·독립운동가) 전도사가 3·1만세사건으로 투옥된 직후 후임 조사였다. 송창근은 1920년 경성독립비밀단의 독립운동 창가 인쇄 배부사건으로 투옥되어 옥살이했다. 풀려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쉬던 중 훗날 한국신학의 거목이 되는 김재준을 만나 평생 그와 함께한다. 그리고 일본 청산학원, 미국 샌프란시스코신학교 프린스턴신학교 웨스턴신학교 아일리스신학교 등에서 공부하고 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1930년대 그는 평양 산정현교회 조사와 당회장, 경북 김천 황금정교회 당회장을 거쳤다.

그는 실천하는 목회자로 부산에 구제기관 ‘성빈학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황금정교회 담임 때는 공덕귀 전도사 등과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김재준 한경직 박형룡 목사 등과 함께 서북출신 기독교 엘리트로 일제 강점기 말과 해방 전후의 한국 교계를 이끌었다.

서울성남교회는 조선신학교(현 한신대)가 1945년 10월 지금 교회 자리 일대에 자리 잡은 뒤인 그해 12월 시작됐다. 1938년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강제 폐교되자 송창근을 비롯한 함태영 한경직 김관식 조희염 채필근 등이 ‘조선인에 의한 장로회 신학교’ 설립에 뜻을 모아 서울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를 출범시켰다. 그 신학교가 덕수교회(현 서울 조선일보미술관 자리)를 거쳐 동자동으로 옮긴 것이다. 이때 교장이 송창근이였다.

서울 동자동 일본 천리교 적산가옥에서 시작된 서울성남교회.

‘흥사단 사건’으로 2년여 옥살이

서울성남교회 터는 강점기 일본 천리교 조선본부사찰이었다. 북한 공산당의 압제를 피해 월남한 서북 기독교인들은 당시 새로운 성전을 열망했고 미 군정과 논의 끝에 천리교 적산가옥을 예배처로 삼았다. 서울의 영락교회(한경직) 경동교회(강원용) 신일교회(이일선)가 이때 불하받은 천리교 사찰이다. 북창동과 삼각지 사찰도 넘겨받았는데 곡절 끝에 각기 지금의 명지대와 숙명여고의 출발 터가 됐다.

성 바울전도교회는 전도하는 교회가 목표였다. 송창근은 전도대를 조직해 매 주일 저녁예배를 마치면 전도 대원을 이끌고 서울역 광장에 나가 노방전도를 했다. 그 노방전도 2개월 만에 교회운영위원회 구성이 가능할 정도로 성장했고 이듬해 5월 제직회가 구성됐다. 그가 노방전도 했던 서울역 광장엔 현재 사이코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던(1919년 9월 2일) 독립운동가 강우규 동상이 우뚝하다. 송창근은 강우규를 도운 배후로 지목돼 옥고를 치렀다. 1937년 흥사단 수양동우회 사건으로도 2년여 옥살이를 했다.

조선총독부 경시청이 작성한 송창근 목사에 대한 조서(위 사진). 서울성남교회 석조예배당 송창근 목사의 성빈(聖貧) 기념비.

“어느 주일 아기를 업고 동자동 길을 걷는데 바울교회라는 간판이 보여 들어가 예배를 드렸어요.…교회 마당에 들어서면 송 목사님이 안아주실 것 같은 표정으로 ‘어 유 집사 어서 오라’ 하실 때 눈물이 났죠.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를 부르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서울성남교회 50주년사 유경손 구술) 당시 서울성남교회 성도들은 그를 엄하면서 인자한 아버지상으로 기억했다.

송창근 제자이자 신학자 이장식(98)은 “교수상이라기보다 기독청년들을 위하던 넉넉한 목회자였다”고 증언했다. 이장식은 6·25전쟁 와중에 납북된 그를 마지막으로 본 제자였다.

“인민군 서울 점령 후 그들은 교회와 신학교에 김일성 초상화를 걸었다. 송 박사님의 노력으로 뗄 수 있었다. 송 박사님에게 장로들이 피난 가시도록 강력히 권했으나 ‘나는 우리 교인 한 사람이라도 서울에 남아 있으면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인민군은 서울 시내 목사들을 집합시켜 승동교회에서 인민군 서울 입성 환영예배를 열도록 했는데 송 박사는 뒤늦게 이를 알고 ‘가자 꼴사나워서’라며 나와 버렸다. 인민군은 그를 종교광으로 몰아세웠다.”

이장식은 9·28 서울수복을 앞두고 교회 마당에 폭탄이 떨어져 성도들이 죽자 삼각산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돌아와보니 스승이 납북되고 없었다. 납북되던 송창근이 강원도 철원을 지날 때 그를 환영 나온 전 YMCA 총무 김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송창근은 그에게 호통쳤다.

“이 배신자야 물러가라!”

교회 앞 쪽방 골목에는 선교회 등이 있어 주민을 돕고 있다(위 사진). 캐나다 장애교인 몰로이 여사 기부로 만든 ‘몰로이계단’.

교회를 지키기 위한 깊은 고뇌

내외문제연구소는 1962년 납북 종교인사 생활기인 ‘죽음의 세월’에서 송창근이 1951년 7월쯤 평남 대동군 문성리에서 쓸쓸히 별세했다고 남겼다.

한편 송창근은 황금정교회 때 잠깐의 친일 경력이 있었다. 그러나 교회 조직과 성도를 지키기 위한 위장 친일이라는 것이 교계 중론이다. 삶 전체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019년 3월. 서울성남교회는 빌딩 숲에 둘러싸여 있다. 부동산재벌이 교회 땅도 집어삼킬 듯한 형세다. 그러면서도 남산 방향은 1970~80년대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소위 쪽방이 벌집처럼 들어서 있고 이들을 돕고자 하는 기독교 선교회 등이 골목마다 간판을 내걸고 있다. 남산 방향 교회 앞편 공원 등엔 노숙인들이 모여 느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교회의 노방전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글·사진=전정희 논설위원 겸 뉴콘텐츠부장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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