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지 넓지 않은 서강대 캠퍼스에서 제일 높은 곳에 세워진 건물은 야트막한 언덕 같은 노고산 중턱에 자리 잡은 로욜라 도서관이다. 도서관 옆에 학생들의 휴식장소로 마련된 몇 개의 벤치 곁에는 자그마한 비석과 한 청년의 얼굴 모습을 담은 조각이 놓여 있다. 비석에는 ‘故 김의기 열사 추모비’라는 큰 글씨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1980년 5월 30일 고인이 서울 종로5가의 기독교회관 6층에서 계엄군의 장갑차 사이로 추락할 때 뿌려진 유인물의 제목이다. 김의기 열사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광주 이외의 곳에서 가장 먼저 그날의 진실을 공개적으로 밝힌 인물이다.

지난달 10일 김병준 당시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은 자신의 SNS에서 김의기 열사를 언급했다. “경북 영주 출신인 김 열사의 죽음이 말해주듯, 5·18은 광주 시민만의 아픔이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아픔”이라고 했다.

한국당 소속 권영진 대구광역시장은 같은 달 16일 이용섭 광주광역시장에게 “저희 당 소속 일부 국회의원들이 저지른 상식 이하의 망언으로 인해 5·18정신을 훼손하고 광주시민들에게 깊은 충격과 상처를 드렸습니다. 자유한국당 소속 대구시장으로서 시장님과 광주시민들께 충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대구시민들 다수도 저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권 시장은 SNS를 통해 이 사실을 밝히면서 “광주시민에 대한 저의 사과와 위로는 사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달빛동맹의 파트너인 대구시장으로서 공적인 것이며, 자유한국당 소속 단체장으로서 제 양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했다. 이 시장은 권 시장의 사과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10년 야당으로 지내던 시절, 그리고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은 후의 모습을 출입기자로서 곁에서 지켜봤다. 출입기자였던 당시 젊은 의원들이나 당직자들을 만날 때면 “한나라당은 (5·18광주민주화운동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민정당의 후예”라고 주장하곤 했다. 절반 정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 그런 분위기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절반 정도는 “무슨 소리냐. 그게 영남 출신 출입기자가 할 얘기냐”라고 화를 냈다.

화를 낸 이들은 한나라당의 뿌리는 민정당이 아니라 신한국당이라며 이미 민정당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냈다고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3년 5월 5·18민주화운동 관련 대국민특별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민주정부”라고 말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지난달 8일 소위 ‘5·18 망언’ 논란이 벌어진 지 한 달이 다 됐다. 같은 달 14일 한국당 윤리위는 이종명 의원에 대해 제명을 결정했고, 김진태·김순례 의원에 대해서는 ‘당대표 및 최고위원 선출 규정’을 들어 징계 논의를 미뤘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논의를 미룰 수 없는 시점이다. 정당의 문제는 정당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규칙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정당에는 법률이라고 할 수 있는 당규와,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당헌이 있다.

당헌에 따르면 한국당은 소득·지역·세대·이념·성 등에 의한 격차나 차별을 해소하여 국민통합을 이루고 공정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기 위해 존재한다. 당헌 제1장 총칙 제2조 ‘목적’이다. 한국당의 존재 목적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역사적 경험을 반성적으로 성찰하여 민주주의를 더욱 성숙시켜 나간다.

경북 영주 사람 김의기가 광주의 참혹한 진실을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냈다는 사실을 김 전 비대위원장이 언급한 것은 국민통합을 지향하는 당의 방향을 밝힌 것이라 생각한다. 논란에 대해 당원으로서 광주에 진심어린 사과를 건넨 권 시장의 모습은 역사적 경험을 반성적으로 성찰한다는 당헌을 실천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한국당 당헌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옳다.

정승훈 사회2부장 s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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