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반상 차별 없어야”… 법복 벗고 독립·나라 재건 이끈 목회자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5) 함태영 목사와 연동교회

함태영 목사

앞줄에 남강 이승훈(1864~1930)이 있었다면 뒷줄엔 송암 함태영(1872~1964)이 있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제1선에 서서 기독교인을 조직했던 남강에 이어 송암은 제2선에서 민족대표들의 도장을 관리하고 선언서 작성을 주도하다가 마지막 서명 단계에서 빠졌다. 민족대표들이 투옥되면 그들의 가족을 돌보고 후사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기독교계 3·1운동의 배후에서 활약했던 함태영 목사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당시 연동교회 전경.

지난 5일 함 목사가 시무했던 서울 종로구 연동교회(김주용 목사)를 찾았다. 1894년 연못골에 설립된 연동교회는 연동역사관을 운영 중이다. 이곳에서 봉사하는 강영옥 권사의 안내로 성도들이 과거 함 목사에게 선물한 족자를 살펴봤다. ‘진광임세보조천하(眞光臨世普照天下)’ 글귀가 눈에 띄었다. 참된 빛은 세상에 임해 널리 천하를 비춘다는 뜻이다. 강 권사는 “천민이 장로로 발탁된 데 반발해 양반 100여명이 다른 교회로 분립해 나가던 1909년, 당시 평신도였던 함 목사는 분립을 외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연동교회에 남았다”면서 “교회는 반상의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것으로 다른 성도들이 매우 고마워했다”고 말했다.

함 목사는 원래 법관이었다. 과거 시험을 보려 했으나 구한말 과거 제도가 폐지되자 새로 설립된 법관양성소에 들어가 수석으로 졸업했다. 서울대 법대 1호 동문으로 불리며, 실제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에도 선정됐다. 경술국치 당시인 1910년 판사직을 그만둔 그는 1915년 평양신학교에 들어갔고 서울 남대문교회 조사(지금의 전도사)로 있다가 3·1운동에 가담했다. 민족대표 33인 외에 배후까지 망라해 검거된 48인 가운데 주동자였다.

함 목사는 출옥 후 약속대로 다른 기독교인 지도자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신학교를 졸업한 1922년 목사 안수를 받은 뒤 1929년 연동교회에 부임해 12년간 시무하고 원로목사가 됐다. 엄혹했던 일제 강점기 장로교 제12대 총회장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한국신학대 설립에 관여해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문을 열었다. 1952년 제3대 부통령 선거에 나가 당선됐다. 독립운동가 출신 종교 지도자이자 나라 재건을 위해 애쓴 정치 지도자였다.

함 목사는 해방 직후인 1946년 한 잡지에서 3·1운동을 이렇게 회고했다. 2009년 연동교회가 발간한 ‘연동교회 애국지사 16인 열전’에 소개돼 있다.

“기독교도들은 빈번한 연락계통을 가지고 집회를 가졌다. 외면으로는 어디까지나 예배였고 기도회였으나 내막에 있어서는 민족해방을 위한 무저항 투쟁의 구체적 협의였다. 그때 우리들의 연락장소는 교회·학교·병원이었다. 이런 곳은 가장 진지한 독립투쟁의 협의처였다. 교회의 목사·장로·집사들은 직접 독립운동의 내부조직 지도자였다. 교회의 전도사와 주일학교 교사들은 민족사상의 고취자이고 교인과 학생들은 애국자이며 민족운동의 실천자들이었다.”

함 목사의 아들 함병춘 박사는 1983년 미얀마 아웅산국립묘지 테러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비서실장으로 수행하다 순국했다. 함 박사는 1980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80년대를 움직일 세계인물 150인’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포함된 교육자이자 정치가였다. 손자 함재봉 박사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거쳐 아산정책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함병춘 박사가 테러로 사망한 후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이 연동역사관에 남아있다. 교회는 함 목사의 호를 딴 ‘송암봉사상’을 제정해 5년 주기로 시상한다. 1999년에는 밥상공동체·연탄은행(대표 허기복 목사)이 수상했다.

연동교회는 함 목사만 언급하고 넘어가기엔 많이 부족하다. 독립협회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를 육성한 월남 이상재 선생,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까지 달려가 순국한 이준 열사가 연동교회에 적을 두었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를 창립한 김필례 선생, 그의 조카이자 2·8독립선언서를 숨겨 국내에 반입했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만들어 독립운동으로 평생을 보낸 김마리아 선생, 1919년 3월 1일 오후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대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 전도사 등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연동교회 원로목사이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장인 이성희 목사는 “교회가 국가의 고난에 동참하고 국가를 위해 교회가 고난을 자초한 것은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주용 연동교회 목사가 5일 서울 종로구 교회의 연동역사관에서 함태영 목사가 한자로 빼곡하게 주석을 써 넣은 성경책을 들어 보이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연동교회는 지난해 이 원로목사의 후임으로 김주용(44) 목사를 청빙했다. 125년 역사의 전통 있는 교회가 40대 젊은 목회자를 청빙해 파격 그 자체로 불렸다. 김 목사는 이날 취재진에게 함 목사가 한자로 빼곡하게 주석을 써 내려간 옛날 성경책을 보여줬다. 김 목사는 “자유 평등 정의를 담은 복음이 이곳 교회에서 먼저 시작해 세상에 퍼져나가길 바랐기에 함 목사님도 반상의 차별에 반대해 교회 분립에 응하지 않았던 것”이라며 “과거 독립운동과 최근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선배들이 지녔던 마음을 회복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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