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대표적 민족 교회… 1964년부터 이어온 화요일 구국기도회 자부심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종교교회

최이우 목사가 6일 서울 종로구 종교교회의 첫 번째 성전에 사용했던 벽돌을 가리키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서울 종로구 종교교회(최이우 목사) 성도들은 1919년 3월 2일 담임 목사의 주일 설교를 듣지 못했다. 3·1운동 직후 담임이었던 오화영 목사가 일제에 의해 구속됐기 때문이다. 오 목사는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이다.

종교교회 교인들은 오 목사가 투옥된 뒤 3년 2개월 동안 그를 잊지 않고 기다렸다. 가족들을 위해 사택을 유지했고 오 목사가 출소한 뒤에는 담임목사로서 다시 설교할 수 있도록 힘썼다. 일부 성도는 배화학당 교사를 자원해 민족교육을 위해 힘을 다했다.

“4000여년 역사를 지닌 우리 조선은 결코 다른 곳으로 부속되지 아니할 터라고 확신했다. 조선은 조선 사람의 조선이 될 줄로만 믿었다.”

오 목사가 1920년 9월 열린 고등법원 재판에서 한 말이다. 오랜 투옥 생활에도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은 그의 모습은 방청객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재판을 받던 일부 지도자들이 일제에 굴복하는 듯한 말을 하는 와중이었다.

자립한 교회, 자주적인 성도

오 목사가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무렵, 종교교회는 서울의 대표적 민족교회였다. 종교교회는 설립부터 한국인에 의해 이뤄졌다. 윤치호는 1893년 미국 에모리대 캔들러 총장에게 200달러를 건네며 선교사 국내 파송을 요청한다. 선교지에서 선교사 파송을 요구하며 성금을 낸 독특한 사례다.

종교교회 초대 담임목사인 로버트 하디 선교사가 1916년쯤 사용한 찬송가. 송지수 인턴기자

그렇게 시작된 미국 남감리회의 한국선교 중심에는 언제나 한국인이 있었다. 1897년 여성 선교사로 파송된 캠벨 부인은 이듬해 배화학당을 시작하고 1900년부터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바로 이 예배가 종교교회의 시작이다. 1903년 30여명이던 교인 수는 1912년 976명에 달했으며 자립·자급 교회로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가 됐다. 윤치호 역시 종교교회 성도로 YMCA 등을 이끌었다.

당시 종교교회의 위상은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식이 열린 명월관(태화관) 기생 이난향의 증언으로도 뒷받침된다. “3월 1일 아침 손병희 선생으로부터 점심 손님 30여명이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상한 일은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 선생뿐 아니라 불교 대표 한용운 스님, 기독교 대표 오화영 목사도 들어섰다는 점이다.” 비종교인이었던 이난향의 시각에선 오 목사가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종교교회에는 민족주의 교육운동가 남궁억 차미리사 김응집 유경상 구자옥 등이 출석하고 있었다. 남궁억은 마태복음 9장을 묵상하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는 찬송가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생을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하며 무궁화 보급에도 앞장섰다. 여성 교육운동가로 덕성여대 전신인 근화여학교를 설립한 차미리사는 종교교회에 여자야학강습소를 설치해 여성들을 가르쳤다.

최이우 목사는 “서울 시내 중심에 세워졌던 종교교회는 당시 보기 드문 민족자립교회였고 이곳에서 성도들은 자주적인 민족정신을 지니게 됐다”고 설명했다.

나라 위한 마음 오늘까지 이어져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민족자결주의가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되자 오 목사를 비롯한 종교교회 인사들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오 목사가 3·1운동 계획을 인지한 것은 그해 2월 16일이었다. 그는 종교교회에서 전임으로 사역했던 정춘수 목사 등의 영향을 받았다. 2주도 안 되는 단기간에 오 목사는 개성과 원산을 다녀오며 3·1운동 계획을 지방 곳곳에 알렸고 많은 교계 인사들을 만나 3·1운동을 계획했다.

최 목사는 이 점에 주목했다. 그는 “3·1운동처럼 민족의 정신적 근간을 형성한 위대한 업적도 어느 순간 찾아온 역사적 갈림길에서 개개인의 내린 작은 선택이 모아진 결과”라고 했다.

종교교회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1964년 12월 시작한 구국기도회다. 성도들은 명절에도 쉬지 않고 매주 화요일이면 어김없이 나라를 위해 기도회를 열고 있다. 최 목사는 지난 5일 열린 구국기도회 설교에서 “3·1운동 당시 참여자들은 이처럼 위대한 평가를 후손들로부터 받게 될 것이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각자 삶의 자리에서 민족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으로서의 삶”이라고 강조했다.

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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