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남진 (19) 연예계 생활 쉬고 싶어 1979년 미국으로 떠나

뉴욕 교포와 결혼 후 레스토랑 운영, 3년 만에 귀국 방송 출연 어려워져…부친이 군사정권의 정적이라 금지

남진 장로(뒷줄 가운데)가 1990년 가족들과 함께 막내아들(앞줄 가운데)의 초등학교 입학을 축하하고 있다.

1979년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하고 싶다기보다는 쉬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65년 데뷔 후 베트남전 파병 기간을 제외하면 쉼없이 연예계 생활을 했다. 많이 지쳐 있었다.

뉴욕에 사는 교포와 결혼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났는데 뉴욕에서 데이트하고 한국을 오가며 양가 허락을 받았다.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어머니는 아내와 나의 점을 11번이나 봤다. 그런데 그 결과가 모두 좋게 나오자 결혼을 빨리 하라고 재촉했다.



처가는 뉴욕에서 레스토랑을 30개 넘게 운영하는 집안이었다. 나도 레스토랑을 하나 맡아 운영했다. 미국에서는 공연을 보러 다니지도, 음악활동을 하지도 않았다. 마냥 쉬고 싶었다. 지금 후회되는 건 그때 음악 공부를 더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피아노를 배운다거나 음악에 대해 연구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결혼해선 아이 넷을 낳았다. 아이 셋은 연년생이다. 당초 생각보다 미국에 오래 머물렀던 이유도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이가 늘었으니 쉬어야 했다. 그렇게 쉬다 보면 또 아이가 생겼다. 그렇게 셋을 키우다보니 한국 복귀가 늦어졌다. 첫째와 둘째는 생일이 1년 차이고 둘째와 셋째는 11개월 차이다.

딸만 줄줄이 셋을 얻었다. 82년 귀국하니 어머니는 딸만 있는 점을 섭섭하게 생각했다. 장남인데 아들이 없다는 게 우울했던 모양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아내는 ‘또 낳자’고 했다. 그렇게 83년 막둥이로 아들을 얻었다. 막내는 지난해 11월 결혼했는데 둘째와 셋째는 아직 결혼을 안 했다. 자식을 결혼시키는 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첫째 사위는 독일에서 사업을 한다. 그래서 독일을 자주 왕래한다. 둘째와 셋째는 나와 같이 산다. 막내는 매형과 함께 미국을 오가며 사업을 한다. 며느리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살던 교포다. 사돈 집안은 지금도 샌디에이고에 산다. 옛말에 ‘손자 바보’라는 말이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손자를 낳으니 알 것 같다. 하나도 버릴 게 없이 귀여운 게 손자다. 손자 보는 재미가 최고다. 여덟 살 외손주 하나와 돌을 앞둔 친손주가 하나 있다.

미국에서 돌아와 82년 12월 귀국콘서트를 했다. 방송국에선 나를 얼마나 반겼는지 모른다. 방송 출연 약속이 줄줄이 잡혔다. 그런데 몇 차례 방송이 나간 후 방송 출연이 연기되기 시작했다. PD들은 이유도 대지 않고 “다음에 출연하자”며 미뤘다. 느낌이 석연치 않았다.

알고보니 당시 방송국은 군사정권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 권력층에 있는 누군가가 “전라도 사람 남진이 좀 어떻게 해 봐”라고 말한 것 같다. 윗사람이 기침을 한 번 하면 아랫사람은 몸살을 일으킨다고 그 말 한마디에 나의 방송출연이 금지됐다고 한다. 요즘 와선 군사정권의 정적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우리 아버지의 친분 때문에 방송이 금지됐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당시의 명목은 시대가 바뀌었으니 새 사람을 출연시킨다는 것이었다. 부산 사람인 나훈아도 그때 방송 출연을 거의 하지 못 했다. 하지만 유독 나의 출연을 더 강하게 막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겁이 났다. 그때는 최고 인기스타냐 아니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무서운 시대였다. 서울을 떠나자고 마음먹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가수로 복귀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정리=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