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독립운동 기록한 벽돌집, 95년 전 그대로 복원

3·1운동 전 세계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의 ‘딜쿠샤’

서울 종로구 사직로 딜쿠샤를 방문한 학생들이 10일 인솔교사로부터 딜쿠샤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그곳을 찾아가는 길은 과거로의 시간여행 같았다. 서울 종로구 사직로의 골목으로 10일 들어서자 ‘홍난파 가옥’이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언덕 위로 보이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이정표 역할을 했다. 은행나무를 보며 걸어가니 막다른 길 끝에 커다란 서양식 주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3·1운동과 제암리 학살 사건을 전 세계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1875~1948)가 직접 짓고 살았던 ‘딜쿠샤’였다.

화강암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주택은 1923년 착공해 이듬해 완공됐다. 총면적 623㎡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거실 너비만 14m에 달할 정도의 큰 저택이다. 한여름 환기를 위해 아치형 창문을 여러 개 달았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벽난로도 6개나 만들었는데 현재는 2개만 남아있다.

테일러와 아내는 외아들 브루스와 함께 딜쿠샤에 살았다. 테일러 부부는 1919년 2월 28일 세브란스병원에서 브루스를 낳았다. 간호사들이 일경의 감시를 피해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숨겨달라고 부탁하자 브루스의 요람 아래 보관했다고 한다. 테일러 부부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의해 1942년 추방됐다. 일제는 AP 특파원으로 3·1운동과 고종 장례식, 제암리 학살을 보도한 테일러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테일러는 재산도 처분하지 못한 채 우리나라를 떠났다.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집의 소유권도 불분명해졌다. 1963년 국가 소유가 됐지만 최근까지 많은 사람이 무단 점거해 살며 테일러의 흔적을 지웠다. 정체불명의 집은 한때 ‘대한매일신보 사옥’이나 ‘베델하우스’로 불렸다. 하지만 2006년 브루스가 수소문 끝에 집을 찾았고 64년 만에 방문하면서 방황하던 역사는 제자리를 찾았다.

앨버트 테일러가 외벽에 붙여놓은 표지석도 딜쿠샤가 역사를 찾도록 도왔다. 그는 표지석의 윗줄에 ‘이상향’을 뜻하는 힌두어 ‘DILKUSHA’를 새겨 넣고 아래엔 ‘PSALM CXXⅦ-Ⅰ’(시편 127편 1절)를 적었다. 브루스는 딜쿠샤를 방문하자마자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 표지석부터 찾았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라는 말씀은 이상향을 향하기 위해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복원 공사가 완료된 딜쿠샤의 내부 예상도.

원형이 훼손된 딜쿠샤는 제 모습을 찾기 위한 복원 공사에 들어갔다. 2020년 7월 구조 공사를 마무리한 뒤 같은 해 12월까지 하우스뮤지엄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안미경 서울시 역사문화재과 학예사는 “복원 후 전체 공간을 전시실로 활용할 계획”이라면서 “앨버트 테일러가 남긴 사료와 테일러 가족의 한국 생활 기록,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렸던 언론 활동 등을 소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등록문화재인 만큼 철저한 고증을 통해 1923년의 모습을 완벽하게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했다.

이곳에서 2㎞ 남짓 떨어진 서울역사박물관에선 ‘딜쿠샤와 호박 목걸이’를 주제로 기증유물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오는 24일까지 진행되는 특별전엔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인 제니퍼 테일러가 기증한 1026건의 사료가 전시된다. 앨버트 테일러는 “한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현재 그는 평안북도 운산금광을 운영하던 아버지 조지 테일러와 함께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혀있다.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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