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남진 (21) 조직폭력배들이 호텔 주차장서 흉기로 습격

업소서 행패 부려 신고하자 보복, 허벅지 찔렸으나 큰 동맥 비켜나가…훗날 범인이 찾아와 사과해 용서

남진 장로가 1990년대 초 무대에서 노래를 하고 있다. 남 장로는 89년 조직폭력배에게 습격을 당해 전치 3주의 부상을 입었다.

1989년 11월 4일 밤 9시50분쯤 서울 중구 장충동 타워호텔 야외주차장. 일본에서 온 연예계 손님과 함께 승용차 오른쪽 뒷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20대 중반의 남자 3명이 갑자기 나타나 그중 한 명이 내 왼쪽 허벅지를 흉기로 찌른 뒤 달아났다. 조금만 옆으로 맞았으면 그 자리에서 사망할 수도 있었다. 큰 동맥이 지나는 바로 옆을 찔렀기 때문이다. 나는 전치 3주의 상처를 입고 순천향병원에 입원했다.

이 사건은 떠올리기 싫은 아픈 기억이지만 가해자들도 이제 60대가 됐을 테니 터놓고 얘기할 수 있겠다. 피습 사건이 있기 3년 전 목포에서 클럽을 운영할 때 가해자들과 언짢은 다툼이 있었다. 소위 깡패라 부를 수 있는 건달들이었다. 조직도 갖고 있었다.



그들이 어느 날 내가 운영하는 업소에 와서 전무에게 공갈 협박을 했다. 나에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직원은 가족과 같은 사람이다. 그때 못 본 체하고 지나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테지만 불의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에 외면할 수 없었다.

서울 생활을 하다 보면 자존심이 상할 때가 많다. 이보다 더 심한 일도 숱하게 겪었지만 섭섭해도 그냥 지나가곤 했다. 그러나 내 업소, 내 고향에서 다툼이 생기면 문제가 전혀 다르다. 내 삶의 터전이기에 잠시 비켜 갈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향 후배들을 그냥 둬선 안 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경찰에 신고했다.

그 결과는 폭력조직의 와해했다. 조직원들이 대거 구속됐다. 그들이 먹고사는 조직이 나 때문에 해체될 위기에 처하니 그 보복으로 날 피습한 것이다. 그 세계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는 한다.

지금도 상처가 남아있어 그 일을 떠올리게 한다. 사건이 있고 한참 후 호텔 커피숍에 누가 와서 꾸벅 인사를 했다. 자세히 보니 날 습격했던 청년이었다. 가정을 이뤄 잘 산다는 얘기를 듣고 아이 잘 키우라는 덕담을 건넸다. 내가 죽지 않고 산 게 그들에게는 굉장히 다행이라고 했다. 내가 죽었으면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됐겠는가. 가정은 이룰 수 있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청년들은 당시 조직의 선배로부터 지시를 받고 그 일을 저질렀다고 사과했다. 그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가끔 연락하며 사이좋게 지낸다. 내게는 정말 깍듯하게, 예의 바르게 대한다.

인생이란 참 이상하다.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용서 못 할 일도 없는 것 같다. 그때 청년들은 총각이었지만 지금은 자식을 둔 아버지다. 자식이 스무 살은 됐을 것 같다. 그들이 지금 와서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내가 젊었을 적 우습고 철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세월이 흘러 돌이켜보면 보복 증오 폭력 같은 건 다 부질없는 일이다. 후회만 남는다.

당시 전국적으로 극장식 스탠드바나 디스코장 카바레 카페 등이 1만여개소가 있었다. 그곳에서 출연하는 연예인만 10만명을 넘었다. 무명일수록 폭행과 협박, 무리한 요구에 시달렸다. 나의 피습 사건이 있고 사흘 뒤 가수 300여명이 모여 ‘연예인들이 걸핏하면 폭력배에 의해 협박 폭행당하는 공포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검찰청사 앞에서 대책 수립을 촉구하는 시위도 벌였다.

정리=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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