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현대차그룹의 임시 주주총회가 돌연 취소됐다. 주주총회까지 불과 8일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주주총회를 멈추게 한 장본인은 의결권 자문기관들이었다. 당시 현대차그룹은 지배구조 개편을 위해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 간 분할·합병을 안건으로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국내외 의결권 자문기관이 줄줄이 ‘반대’ 의견을 내놓으면서 ‘표 대결’은 시작도 못한 채 무산됐다.

상황은 10개월 만에 반전됐다. 이번에도 열쇠는 의결권 자문기관이 쥐고 있다. 세계 1, 2위 의결권 자문기관들이 현대차를 겨냥한 미국계 행동주의펀드 엘리엇의 ‘고(高)배당 요구’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이번 정기 주주총회에선 현대차그룹이 승리를 거둘 것이란 관측이 쏟아진다. 주주도, 기업도 아닌 ‘자문기관’이 주주총회의 승패를 판가름하는 막강 권력을 지닌 셈이다.

주주총회 시즌을 맞으면서 자본시장의 눈은 ‘숨은 권력’ 의결권 자문기관으로 향한다. 기관투자가와 외국인 투자자들은 이들의 판단 결과, 보고서를 근거로 계산기를 두드린다. 지난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기점으로 올해부터 의결권 자문기관의 목소리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다만 중요성에 비해 국내 의결권 자문기관 시장은 열악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의결권 자문기관은 주요 기업의 주주총회 안건을 분석해 찬성 혹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민간회사다. 기관투자가들은 보유한 종목 수가 많아 개별 안건에 대한 투표방향을 일일이 결정하기 어렵다. 때문에 의결권 자문회사의 권고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국내 기업 사정에 어두운 외국인 주주에게 ISS, 글래스루이스 같은 글로벌 의결권 자문기관이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요 의결권 자문기관은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대신지배구조연구소, 서스틴베스트,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ISS, 글래스루이스 등이 있다.

한국에서 의결권 자문기관의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2016년 3월 SK그룹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기관 ISS는 SK그룹 외국인 주주들에게 최태원 회장의 등기이사 선임에 반대하라고 권고했었다. 하지만 최 회장은 주주 과반의 찬성을 얻어 등기이사에 복귀했다. 지난해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13일 경제개혁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의결권 자문기관이 반대를 권고한 안건 가운데 국민연금과 자산운용사들이 실제로 반대표를 행사한 비율(일치율)은 25%에 그쳤다.

그러나 올해부터 다른 모습이 연출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된 이래 본격적으로 열리는 첫 정기 주주총회이기 때문이다. 기관투자가들이 ‘거수기’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실질적인 행동력을 갖추려면 의결권 자문기관의 의견에 귀를 더 기울일 수밖에 없다. 박창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펀드매니저 입장에서는 스튜어드십 코드 의무를 완수했는지 증명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 ‘자문사에서 권고한 대로 했다’고 말하는 것”이라며 “(자문사에서) 반대 권고를 했는데, 펀드매니저가 찬성표를 던지려면 설명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고 말했다.

의결권 자문기관의 힘이 갈수록 커져도 괜찮은 걸까. 전문가들은 주주행동주의가 한국 자본시장에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본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주주들이 의결권 행사 방향을 모두 사전에 알기는 어렵기 때문에 다양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문기관들의 역할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목소리가 큰 행동주의 펀드와 기업 사이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이다. 2014년 애플에 지나친 자사주 매입확대를 요구했던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이 의결권 자문기관의 반대에 밀려 철회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육태우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언론사에서 (문제점을) 비판해주듯이 의결권 자문기관도 그런 역할을 해준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물론 의결권 자문기관의 독립성이나 신뢰성에 대한 의구심도 남아 있다. 자문기관이 주주총회 안건을 직접 평가하는 만큼 ‘외풍’에 흔들리면 잘못된 결정을 낳을 수 있다. 2013년 터진 KB금융지주 사태는 이런 부작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KB금융지주는 2012년 말 ING생명 인수를 추진했지만 일부 사외이사 반대에 부딪혔다. 인수 안건은 이사회에서 부결됐다. ING생명 인수를 추진해온 당시 KB금융지주의 부사장은 주주총회를 앞두고 ISS와 접촉해 내부 문건을 제공했다. ISS는 이를 바탕으로 ING생명 인수를 반대한 사외이사들을 재선임하지 말라고 권고했었다.

부작용은 극히 일부라는 반박도 있다. 자문기관 산업 자체가 평판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로비나 외풍으로 신뢰가 깎이는 건 치명타이기 때문이다. 박창균 선임연구위원은 “자문기관이 일방적으로 회사편만 들어주면 아무도 그들의 권고를 믿지 않을 것”이라며 “경제학에서는 ‘평판 효과’라고 하는데 이게 의결권 자문기관에는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의결권 자문기관의 위력이 세지면서 금융 당국은 올해 안에 관리·감독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미국과 달리 국내 의결권 자문기관은 컨설팅업이나 여론조사업으로 등록돼 별다른 관리·감독을 받지 않는다. 성태윤 교수는 “자문기관이 어떤 정보를 제공했고, 그 결과가 어땠는지 사후평가를 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면서도 “다만 이런 부분도 평판 형성으로 판단되는 게 더 맞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박 선임연구위원도 “당국이 (자문기관을 상대로) 분석할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 물적 인적 인프라가 있느냐 정도를 볼 수 있겠지만 가장 바람직한 것은 시장에서 신뢰성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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