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남진 (23) 정부 관리 벗어난 ‘대한가수협회’ 초대 회장

권익·복지 향상 위해 2006년 결성…최백호·신해철·이효리 등 트로트·발라드 가수 ‘통합’ 출범

가수들이 2006년 5월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대한가수협회 창립총회를 열고 기념 촬영을 했다.

1991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 14회 위원장을 맡았다. 전임이던 가수 김광진의 부탁을 받아서였다. 가수분과위원회는 신인부터 원로까지 가수들이 모두 모여 친목을 다지던 모임이었다. 문화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연예협회 배우협회 국악협회 등을 관리할 때였다. 연예협회 안에 작곡 무용 연주 등의 분과가 있었고 가수분과위원회는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가수분과위원회는 생각처럼 원활하게 활동할 수 없었다. 한국연예협회라는 상위 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한국연예협회 18대 이사장을 맡았다. 주로 한 일은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연예인들에게 시상을 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상까지 받게 했으니 단체의 힘이 꽤 있었다.

그런데도 한계를 느꼈다. 진정 가수들이 원하는 목소리를 내려면 바로 제재가 들어왔다. 정부의 관리하에 있었던 탓이다. 요즘은 쇼 프로그램이 다양하지만 예전에는 한정돼 있었다. 공연은 모두 정부의 감시하에 이뤄졌다. 정부가 관리하는 단체에선 그런 문제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우리 세대는 그래도 나았다. 선배들인 원로급 가수들은 방송 출연도 마음대로 못했고 수입이 없어 비참하게 사는 분이 많았다.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 가수 현인은 기독교인들이 임종까지 모든 걸 돌봐드렸다. ‘아빠의 청춘’을 부른 가수 오기택도 뇌출혈로 힘들어할 때 박상동 동서한방병원장 등 기독교인들이 도움을 주었다. 선배들 중에 누구나 이름을 들어봤음직 한 유명 가수라도 지금과 같은 대접을 받기는 어려웠다.

가수들의 권익 증진과 원로급 선배들의 복지 향상 등을 위해 정부 산하가 아닌 독립적인 협회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름 있는 가수들이 총대를 메고 젊은 가수들이 참여했다. 그렇게 정부에서 독립해 가수들이 주체적으로 2006년 설립한 게 대한가수협회다. 나는 임기 2년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

대한가수협회를 창립할 때 후배 가수들이 잘 따라준 점이 지금도 고맙다. 그전에는 트로트 가수 따로, 발라드 가수 따로, 모두가 따로 놀았다. 이들을 뭉치게 하는 게 큰 과제였다. ‘낭만에 대하여’를 부른 최백호, ‘그대에게’를 부른 신해철, 그룹 ‘핑클’의 이효리 등 많은 가수가 도움을 줬기에 모두가 함께할 수 있었다. 2006년 5월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총회를 열고 그해 11월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가수 200여명이 모여 창립식을 했던 게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대한가수협회가 보장받고자 한 권익은 이렇다. 노래방이나 방송에서 가요가 나오면 그 저작권이 작곡가 작사가 연주가 가수 등에게 돌아간다. 가수들은 그 저작권료의 배분 비율이 불합리하다고 여긴다. 작곡가와 작사가도 곡을 쓰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곡이 성공하는 데 있어 가수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음악 스트리밍의 경우 유통사와 제작자 작사·작곡가의 몫을 제하고 가수·연주자가 받는 몫은 6% 정도다.

원로급 선배 중에 생활이 힘든 분이 많다. 오늘날 가요계가 있기까지 고생을 많이 했지만 요즘 유명 가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 산다. 저작권료 분배를 현실화하면 협회에서 원로급 선배들을 돕자고 회원들에게 요청할 명분이 생길 것 같다.

정리=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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