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평 쪽방에 사는 서울 동자동 주민 415명의 공동체 ‘사랑방마을 주민협동회’가 16일 용산구 성민교회에서 제9차 정기총회를 열고 유영기(64) 이사장의 연임을 결정했다. 주민들 앞에 모자를 벗고 선 유 이사장은 자꾸 마이크 쥔 손을 떨궜다. “하여튼 주민 여러분의 심부름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청소부터 잘하겠습니다.”

봄기운 찾아온 교회당에 박수 소리가 울렸다. 유 이사장은 의장석에서 출자금 총액부터 회계 보고했다. 기초생활수급비, 폐지 주운 돈, 일용직 일당…. 각자가 조금씩 모은 돈이 8년간 쌓이니 2억7000만원이었다. “공원에서 술판만 벌이지 말고 사람답게 살자”며 협동회가 창립된 2011년에는 1000만원이었다. 외부의 도움 없이 훌쩍 자란 재원에서 6억원 넘는 소액대출이 공급됐다. 대개는 쪽방촌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병원비로 쓰였다.

이번 총회에서도 “대출과 상환에 별 무리가 없다”는 감사 결과가 승인됐다. 담보도 보증인도 없이 승인된 대출이 약 3000건이지만, 상환을 포기하거나 잠적한 차주는 1명도 없다. 저신용층이란 말은 누가 정하는지, 지난해 말 현재 소액대출 상환율은 89%고 협동회의 부채는 0원이다. 정부 주도로는 왜 이런 마이크로크레디트가 안 되냐고 국회가 개탄한 적도 있다.

“연체하면 이자율이 높아지지 않느냐”고 물으니 주민들은 개념부터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지난해 협동회의 감사였던 김호태(74)씨는 “1명당 50만원까지 빌려주는데, 갚을 때까지 1년이고 2년이고 기다린다. 이자는 50만원을 빌렸을 때 딱 1만원이다”고 말했다. 비가 내릴 때까지 매일 기우제를 지내는 억지는 아니었다. 김씨는 “어려운 이들의 한푼 두푼임을, 빌리는 이가 잘 안다”고 말했다.

주민협동회가 만들어 주는 통장은 볼펜으로 눌러 적는 방식이다. 3만원, 5만원…. 수기(手記)된 금액마다 도장이 찍혀있다. 표지엔 할아버지부터 갓난아기까지 온 가족이 활짝 웃는 삽화가 그려져 있다. 쪽방촌의 사람들은 그런 가정을 갖지 못하고 대부분 혼자 살지만, 통장을 소중하게 여긴다. 유 이사장은 “어느 회원이 자기 방에 가서 조심스럽게 통장을 펼쳐 보는 모습을 봤다”고 말했다.

대기업도 위기라던 지난해에 동자동 협동회는 867만8000원 흑자를 달성했다. 예치금·대출금 이자수익 이외에도 공동경제 실험이 성공적이었다. 협동회는 부탄가스 28개 1박스를 2만원에 들여와 4개를 3000원씩, 2만1000원에 팔았다. 동자동엔 어차피 부탄가스로 라면을 끓이는 이가 90%였다. 두부김치와 파전을 차려 남영역에서 후원주점도 열었다. 적립된 이익은 의료비 지원에 쓰인다.

쪽방마다 스며든 의미 있는 변화를 계량화할 수 있을까. 유 이사장은 “지금도 술판이 벌어지긴 하지만, 2병 먹을 걸 1병 먹는다”고 현답을 했다. 어느 회원은 통장에 80만원이 모이자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고 말했다. 사람 목숨 우습게 알던 대통령의 재산이 29만원이니, 두려울 것 없다는 말이 허세로만 들리지 않는다. 이제 주민들은 쪽방을 나와 김용균 노제에도 가고, ‘빈민의 벗’ 정일우 신부 추모미사에도 참석한다. 민심을 저버렸다가 구치소에 엎드린 전직 대통령보다 자유롭다.

이날 교회당 맨 뒤에서는 김경숙(82) 할머니가 씩씩하게 박수를 쳤다. 심장이 아파 한동안 고생했다는 김 할머니는 지난해 협동회로부터 의료비를 지원받은 쪽방촌 주민 12명 중 1명이다. 그는 “협동회 사람들이 약을 지어주고 병원에 데려다줬다”며 고마워했다. 저축한 돈은 20만원 수준으로 보잘것없지만, 급할 때 꺼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했다.

총회를 마친 주민들이 한 줄로 서서 천연펄프 화장지 묶음을 선물로 받았다. 호혜나 연대란 철 지난 운동권의 대사라는 비아냥이 그간 많았다.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이 자본주의를 어떻게 이기느냐는 의문도 계속됐다. 동자동 사랑방마을 주민협동회는 그 비아냥과 의문들에 대한 작은 답변일 것이다. 김 할머니가 자신의 방을 찾아 언덕을 올랐다. 들고 가는 화장지 포장에 ‘부자 되는 집’이라고 적혀 있어서, 나는 기자의 본분을 잊고 할머니 꼭 그러시라고 잠깐 기도했다.

이경원 경제부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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