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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 기자 성기철의 수다] 나이를 한두 살까지 따지는 나라


중국·일본에 없는 독특한 생물학적 서열화에 순응하는 젊은이들 이해 안돼
나이 묻지 말고 언니·형 대신 ‘○○씨’라 부르면 안될까


우리처럼 나이를 중시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처음 만난 사람에게조차 ‘실례지만’이라며 대놓고 나이를 묻는다. 낯선 사람끼리 싸우다 밀리면 “어린 것이, 너 나이 몇 살이야”라고 윽박지르기 일쑤다. ‘나이가 벼슬인 나라’란 말이 나올 만도 하다.

나도 나이를 많이 따지는 편이다. 초면인 사람과 두어 시간 밥 같이 먹고 나이를 모른 채 헤어지면 어딘가 찜찜하다. 동갑이면 말을 트고, 두어 살 연장이면 형으로 모시고, 연하면 형 대접받는 식으로 단번에 가르마를 타야 속이 시원하다. 오지랖 넓게도 주변사람들에게 이쪽이 형, 저쪽이 동생이라고 감히 교통정리하려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신문에서 인물기사를 읽다 나이가 없을 경우 답답함을 느끼는가 하면, TV 시청하다 탤런트나 가수의 나이가 궁금해 자주 인터넷 검색을 한다.

이런 심사는 나이가 들수록 더 커지는 것 같다. 요즘은 오로지 나이만 따져 형동생, 혹은 선후배를 가르고 싶어진다. 이 나이에 사회가 정한 간판이나 직위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서다. 단순무식해서 그런가 싶기도 해 나는 이런 심사를 결코 자랑하진 않는다. 환갑 바라보는 ‘아재’라서 그런가도 생각해 봤다. 한데 나이 들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성기철 경영전략실장 겸 논설위원

요즘 젊은 친구들은 부모 세대에 비해 나이를 더 세밀하게 따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대학생들과 대화해 보시라. 입학연도 학번보다 나이를 단연 우선시한다. 같은 학번이라도 재수를 해 한 살 많으면 깍듯이 언니, 혹은 형 호칭을 한다. 학번이 달라도 나이가 같으면 친구처럼 지낸다는 얘기와 다름 아니다. ‘빠른 ○○년생’까지 감안한단다. 젊은 직장인들한테서도 비슷한 얘길 듣는다. 입사 동기 사이에도 나이에 따라 서열이 매겨진다. 한 살만 많아도 언니, 형이 된다.

이런 현상을 장유유서(長幼有序) 문화에서 찾곤 하는데 사실과 다르지 않나 싶다. 장유유서는 ‘맹자’에 나오는 말로 어른과 아이, 나이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 사이에 질서를 유지해야 건강한 사회가 된다는 유교 가르침이다. 하지만 장유유서는 본디 사회윤리가 아니라 가족윤리다. 가족이나 친척 간의 도덕률이지 사회에서 만난 남남 사이를 규율하는 법도가 아니란 말이다. 가까운 촌수의 혈연관계라면 당연히 한두 살까지 따져야겠지만 남남 사이는 그럴 필요가 없단 얘기다. 실제로 한두 살 갖고 장유유서 따졌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학교나 직장에서 만나는 서너 살 차이 선후배는 옛 사람들 기준으로 보면 친구일 뿐이다.

우리가 아는 역사인물 가운데 절친으로 알려진 김춘추와 김유신은 무려 9세, 정도전과 정몽주는 5세, 이항복과 이덕형도 5세 차이다. 내 어릴적 시골에서도 어른들 사이엔 이런 규칙이 있었다. ‘5∼6세까지는 어깨동무 친구, 7∼8세까지는 말 트는 친구, 13∼14세까지는 맞담배 친구’. 물론 남남 사이일 때 얘기다. 이런 규칙이 무너진 건 근대적 학제 도입 때문 아닐까 싶다. 같은 나이에 학교에 가게 되면서 친구가 되고 학년의 높낮이에 따라 선배, 후배가 생겼다. 자연스럽게 선배가 언니, 혹은 형이 된 것이다. 서너 살 많은 선배에게 반말했다간 혼쭐나기 마련이다.

수년 전 딸아이가 미국인 친구를 집에 데려온 적이 있다. 교환학생 갔을 때 처음 알게 돼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고 했다. 친구가 가고 나서 딸아이에게 친구 나이가 몇인지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모르는데요. 물어본 적이 없어요”. 평소 학교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한두 살까지 따진다는 녀석이 몇 년간 사귄 친구의 나이엔 무관심하다니…. 그러면서 딸아이는 이런 말도 했다. 비슷한 연령의 한국인과 외국인 젊은이들이 뒤섞여 만난 자리에서 한국인끼리는 굳이 나이를 따져 언니 호칭을 한다는 것이다. 말도 존대를 하고. 참 희한한 장면 아닌가.

미국은 그렇다 치고, 같은 유교 문화권에다 유사한 학제를 가진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발견하기 힘든 우리나라만의 별난 현상이다.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나이로 일찌감치 형, 동생을 정하면 관계 친밀도를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은 상당부분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단순히 생물학적 나이가 서열을 강제하는 듯한 측면은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다. 인간관계는 수직적이기보다 대등한 게 더 편하고 발전 지향적이라고 본다. 사회적, 국가적으로도 구성원의 개성과 다양성, 창의성을 확보하려면 가급적 수평적 인간관계를 많이 구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부터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월반과 유급, 조기졸업이 사라졌다. 직장에서는 여전히 능력이나 성과보다 근속연수가 중시되고 있다. 그 사이 나이가 서열을 정하는 중요한 잣대로 비집고 들어온 모양새다. 직장에서의 ‘싸구려 형님문화’도 그 부산물 아닐까 싶다. 공조직 결재라인에서 정상 처리된 결정이 비공식 형동생 관계 개입으로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직의 합리적 의사결정 체계를 금가게 하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

나이 차이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나이 차이로 정해진 서열 또한 변할 리 만무하다. 그런데 변화와 개혁을 갈구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은 왜 능력이나 인성, 경험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 생물학적 서열화에 아무 저항 없이 굴복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한국적 나이 시스템에 그들은 왜 부모세대보다 더 순응하는지 좀체 이해되지 않는다. 비슷한 연배라면 나이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이렇게 부르면 안 될까. “서연씨” 혹은 “어이 서연”.

성기철 경영전략실장 겸 논설위원 kcs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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