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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역사여행] 독립선언서 품은 기독학생, 호남 만세운동 불씨 놓다

독립운동가 김병수 장로와 김제·익산

전북 익산시 중앙동 옛 삼산의원 건물의 이전 설치가 한창이다. 세브란스의전 출신 독립운동가 김병수 장로가 일제강점기 운영했던 병원으로 2005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구 삼산의원’으로 불렸으며 인근에서 옮겨졌다. 김병수는 이곳에서 가난한 자들을 돌봤다.

전북 익산역 앞 중앙동 일대를 한참 돌아다녀도 ‘구 삼산의원’ 건물을 찾을 수 없었다. 중앙동 우체국 주변을 몇 바퀴 돌았으나 뭐에 홀린 듯 제자리였다. 구도심 중앙동은 인적이 드물었다. 지긋한 분들에게 물어도 “이 주변인데…” 하더니 찾지 못했다. 60대 아주머니가 미로를 탈출하게 도와줬다. 중앙동 토박이라는 남편에게 전화로 도움을 받아서였다. 아주머니는 친절하게 골목을 몇 차례 돌아 구 삼산의원 앞으로 안내했다.

벽돌 2층 건물. 건축 벽면에 수평의 띠 모양을 돌출시킨 소위 코니스 장식을 한 근대건축물이었다. 창문과 출입구는 아치형이다. 이 건물은 1922년 독립운동가 김병수가 자신의 호를 따 개원한 병원이었다. 2005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익산시는 최근 도시 재생사업에 따라 리모델링 이전을 결정했는데 마침 후속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건물이 중앙동 우체국 쪽에서 100여m 떨어진 이 자리에 통째로 이전된 것이다. 그러니 찾을 수 없었다.

김병수 장로 (1898~1951)

김병수는 전북 김제시 백구면 유강리 지역 유지였던 김씨 문중의 똑똑한 자제였다. 호남평야 지주였던 문중은 어찌 보면 세도가였다. 따라서 변화를 원치 않았다. 그런데 1895년 미국남장로회 전킨 선교사가 군산에 도착, 복음을 전하면서 군산선교부가 설립됐고 선교사들은 군산에서 가까운 이리(현 익산)·김제 등에도 순회 전도를 했다.

치문초교 뒤 김씨 문중 사택을 송민영 교장이 안내했다. 호남 명문가가 기독교 사상으로 시작한 학교다.

이때 김씨 문중은 시대가 변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식들에게 ‘야소교’ 선교사들이 권하는 신식학문을 배우라고 했다. 나아가 그들은 사회적 신분의 의무를 다하고자 지역에 신식 학교를 설립했다.

구 삼산의원을 찾기 전날인 지난 7일이었다. 김병수의 출생지 유강리를 찾았다. 교회 예배당과 초등학교가 있는 평범한 마을이었다. 한강 이남 첫 3·1만세사건인 ‘3·5군산만세운동’과 ‘4·4이리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의 고향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김병수가 졸업한 현 서울역 앞 세브란스의전 사진. 학교 앞에서 3·1 만세운동을 했다.

김병수는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품에 안고 자신의 모교 군산 영명학교(중·고 과정) 교사 박연세에게 전달해 군산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서울로 올라가 남대문역(서울역)에서도 독립 만세를 외쳤다. 남대문역 앞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연세대 의대 전신) 스승 동창 등과 함께였다.

‘독립운동사 사료집’ 제5권은 ‘전라남북도의 책임자만 없으므로 이갑성이 세브란스의전 학생 김병수에게 부탁하여 전라도 지방을 순회하여 동지를 모집게 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일제의 ‘예심종결결정서’ 기록을 바탕으로 한 사료집이다. 박연세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군산선교부가 세운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유강리 신명학교 교사를 하다 다시 모교 교사생활을 했다. 그 제자가 김병수였다.

김병수 등이 신학문을 한 김제 치문초교 교정의 해공 신익희 선생의 친필 육영 기념비.

당시 신문 “인품 고결한 크리스천”

김병수와 같은 독립운동가의 탄생은 복음이란 하나의 밀알 때문이다. 그의 집안 당숙 김연식은 외진 촌마을까지 선교에 나선 선교사들의 권유로 아버지 김장호와 함께 1908년 신명학당(김제 치문초교 전신)을 세운다. 김병수는 이곳에서 한글을 깨치고 대처 군산 영명학교로 진학했다.

이날 유강리 치문초교는 시골의 여느 초교와 같이 충무공 동상과 국기게양대가 있었다. 한데 국기게양대 옆 2m 넘는 기념비가 눈길을 끌었다. 단기 4288년(1955년) 12월 세워진 기념비에 초서체가 호방했다. 해공 신익희(1894~1956·독립운동가)가 김연식의 육영사업을 치하하는 기념비였다. 이 학교는 1978년 공립학교로 전환되기 전까지 기독교 사상에 의해 운영됐다. 3·1운동과 1944년 무렵 반일학교로 폐교되고 복교되기도 했다. 치문은 김장호의 호이다.

“김병수 선생은 제 시아버지(김병기·김연식의 아들)와 육촌 형제간입니다. 김씨 문중 형제들이 대개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을 펼쳤어요. 김병수 선생은 군산 서울 익산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운동 그리고 전도 활동을 벌였어요. 강점기 이리제일교회 장로셨고요. 아드님 김신기 선생이 삼산의원을 이어받아 의료복지 소외자들을 돌봤어요. 구 삼산의원을 그만두신 후 익산 왕궁면에서 삼산의원을 개원해 한센병 환자에게 무료 진료를 했고요.”

김씨 문중의 애국 운동을 증언하는 김씨 문중 며느리 홍정자 장로. 치문초교 교사였다.

치문초교 뒤편에 사는 홍정자(전 치문초교 교사) 유구교회 은퇴 장로가 문중의 인물들을 얘기했다. 수 대에 걸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명문가였다. 홍 장로 집 대들보에는 리본 크기만 한 ‘유강교회’ 교우의 집 표식이 선명했다. ‘전화 479번’이라고 함께 적혀 있었다.

익산 이리제일교회 옛 예배당. 앞줄 오른쪽 끝이 김병수로 추정된다.

김병수는 만세운동 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3개월을 복역했다. 출옥 후 학업을 계속했고 1921년 군산 야소교병원에서 인턴을 거쳤다. 그리고 이듬해 삼산의원을 개원했고 개인재산을 털어 이리 광희여숙을 설립했다. 이 학교 운영에는 이리제일교회 등이 참여했다. 김병수는 1924년 장로가 됐다. 당시 신문은 ‘인품이 고결하고 단아한 크리스천으로 장로의 요직에 있어 교회를 섬기고 몸과 재산을 바쳐 여학교와 유치원 등을 경영하고 있으며…’(동아일보 1933년 2월 11일 자)라고 전했다.

그러나 광희여숙은 일제의 강압으로 폐교됐다. 심지어 일제가 발악하던 1944년에는 일본기독교회라는 이름 아래 이리제일교회마저 인근 교회 등과 통폐합됐다. 김병수는 그 혹독한 시대를 학교와 청년단체(이리YMCA) 설립, 그리고 구제 활동을 하며 견뎌 나갔다. 체육구락부와 기계(棋界·바둑)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기계는 ‘대구의 서병오, 익산의 김병수’라고 칭할 정도였다.

6·25 전쟁 땐 군의관으로 활약

그는 해방 후 민족의 미래에 뜻을 두고 건국준비위원회(건준)·독립촉성회 활동을 했다. 건준이 애초 설립 취지와 달리 인민위원회 성격으로 변하자 과감히 결별했다. 1947년에는 이리읍이 이리부로 승격하자 초대 부윤(시장)으로 시정을 총괄하기도 했다.

김병수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 동래 제5군육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도 최선을 다했다. 수복 후 고향에서 구국총력연맹 위원장으로 국가 재건에 나섰다. 예수 평화가 그의 염원이었다. 하지만 결핵이 악화하여 1951년 별세하고 말았다. 이리제일교회 성도 등 수많은 사람의 염원 속에 장례가 치러졌다.

김병수 아들 김신기 부부. 한센병 환자를 위한 무료병원을 운영했다. 아산복지재단 제공

그 신앙의 피는 아들 김신기(90) 며느리 손신실(84) 의사 부부로 이어졌다. 이들은 인생 후반을 한센인 마을에서 죽겠다며 그들을 돌봤다. 그 공로가 인정돼 2014년 아산사회봉사상을 수상했다. 겨자씨만큼의 밀알은 이처럼 사랑의 나무가 되어 나고 진다.

익산·김제=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뉴콘텐츠부장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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