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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문록] 등가교환의 법칙


사람과 함께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일들이 있다. TV나 인터넷 같은 매체를 보게 되는 것도 그중 하나다. 며칠만 지나도 거품처럼 가라앉는 뉴스들이 대부분이지만, 동시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아둘 요량으로 나도 누나를 따라 귀를 기울이고 앉는다.

웬일인지 요즘 사람들은 ‘귀엽다’는 말을 예전보다 열두 배는 더 많이 하게 됐다. 그 대상이 어린 아이들만이 아니다. 심지어 나이든 이들에게도 쓴다. 어머, 귀여우셔라. 은근 귀여우시네요. 나이와 상관없이 누군가 어린아이 같은 면모를 보여줄 때, 곰살맞고 애교스러울 때, 생김새와 달리 의외로 엉뚱하고 어설프지만 친근하게 느껴질 때 등등. 사람이 그러하니 작고 귀여운 동물들은 당연히 귀엽다. ‘프로불편러’인 내가 캉캉 짖으며 내 의견을 말할 때면 누나도 내게 말한다. ‘보리 이 녀석, 귀여워서 봐준다.’ 인터넷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귀여운 동물들의 사진과 영상이 올라온다. 그런 영상은 어떤 뉴스보다 조회수와 공유수가 높다. 귀여운 존재들에게는 찬사의 댓글들이 줄줄이 달린다. 신 앞에 바치는 공양물처럼.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마스코트 수호랑은 큰 머리와 ‘허당끼’로 귀여움을 받았다. 수호랑이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문 사이에 낀 ‘움짤’은 우리 누나도 좋아했다. 펭귄 뽀로로가 전 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나 카카오프렌즈의 어피치가 한국관광공사의 홍보대사로 선정될 만큼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도 큰 머리 덕분이다. 사람들은 클레오파트라의 코 높이를 얘기하지만, 내 머리가 조금만 더 컸다면 내 견생이 지금보다 더 호사스러워졌을지도 모른다.

큰 머리와 작은 키, 짧은 팔다리, 둥근 얼굴과 커다란 눈. 종족 보존을 위해 사람들이 유아를 닮은 이런 생김새를 본능적으로 좋아하도록 진화돼 왔다고 동물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재밌는 가설도 있다. 누나가 읽어준 영국 동물학자 클라이브 브롬홀의 책 ‘영원한 어린아이, 인간’에 의하면 인류는 유인원에서 진화한 게 아니라 오히려 유인원의 태아나 유아에 가까운 형태로 퇴행한 것이라고 했다. 맹수의 위협에 노출된 인간이 대규모 집단생활을 하면서 사교성과 협동성이라는 유아적 특징을 생존전략으로 삼게 됐고, 이러한 ‘유아화(乳兒化)’가 인간의 삶의 방식이 됐다는 것이다. 성숙한 것보다 어려 보이는 것, 독립적인 것보다 의존적인 걸 더 선호하고, 심지어 스스로 유아화의 역방향 진화를 했다니! 만물의 영장이라고 뻐겨온 인간의 삶이 알고 보면 그토록 힘겹고 혹독했다는 말인가? 요즘 사람들이 귀여움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도 수백만년 전 인류처럼 다시 치명적 위협 상황에 마주쳤기 때문일까? 어쩐지 마음이 짠하다.

그러나 사람도 동물도 평생 귀여울 수는 없다. 어리고 귀여운 것에 감탄하는 것만큼 늙고 병들고 상처받은 것에 비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김혜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최근 몇 주 동안 누나와 본방사수를 했던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25세 할머니 말이다. ‘세상은 등가교환의 법칙에 의해서 돌아가. 뭔가 갖고 싶으면 그 가치만큼의 뭔가를 희생해야 한다 이거야. 등가교환, 거저 주어지는 건 없어.’ 세상의 모든 귀여운 것들은 더 이상 귀엽지 않을 때가 온다. 귀여움이 주는 위로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다. 귀여움을 내주고 얻는 소중한 무엇이 있다는 것, 이것만 기억한다면 내남없이 늙어가는 우리의 삶은 그래도 눈이 부실 거다.

최현주 카피라이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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