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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국 한국, 일본이 식민통치하며 기독교 박해” 세계에 알려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7) 김규식 장로와 새문안교회

김규식 장로(앞줄 왼쪽 다섯번째)가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상하이로 떠나기 전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전별식 단체사진. 김 장로 왼쪽이 새문안교회 설립자인 호러스 언더우드 선교사다. 새문안교회 제공

열강이 약소국을 식민지로 삼던 제국주의가 세계를 휩쓸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자신의 말과 글이 있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명국가’ 한국의 독립을 만방에 알린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등 8개 국어를 유창하게 한 ‘언어 천재’ 우사 김규식(1881~1950) 선생이다.

그가 일제강점기 미국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 공간에서 좌우 합작에 힘쓴 사실에 비해 신앙을 바탕으로 독립을 꿈꾼 점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국민일보는 원로 사학자인 윤경로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기억·기념분과위원장을 지난 1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만나 새문안교회가 배출한 김규식의 신앙과 그의 행적에 대해 들었다. 윤 위원장은 새문안교회 은퇴장로로 이 교회 1대 사료관장을 지냈다.

김규식의 신앙 이력을 논할 때 호러스 언더우드 선교사는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국내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와 연세대, 한국YMCA 등을 세운 언더우드는 6살 김규식을 만나 10여년간 그를 돌봤다. 부친이 귀양을 가 숙부 집에서 고아처럼 자라던 김규식이 안타까웠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7년 자신이 설립한 고아학교로 그를 데려간다. ‘원두우 학당’이라 불린 이 학교에서 김규식은 영어와 자연과학 등 서구 학문과 함께 기독교를 접한다.

그가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기독교에 입교한 건 미국 유학 2년 차 때인 1898년이다. 김규식은 17세 때 미국 버지니아주 로어노크대에 입학해 6년간 유학 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전 과목 성적이 우수했을 뿐 아니라 학내 웅변클럽에서 회장으로 활동할 만큼 웅변 실력도 뛰어났다. 학보에 ‘동방의 서광’(1902년) ‘러시아와 한국 문제’(1903년)’ 등의 글을 기고하며 한국의 상황을 미국에 알리는 데 힘썼다.

학문에 두각을 나타냈던 그이지만 러일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프린스턴대학원 영문학 석사과정을 마친 후인 1904년 귀국한다. 박사과정 장학금 제안까지 뿌리치고 조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마음으로 온 것이었다.

윤경로 새문안교회 은퇴장로가 지난 1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김규식 장로와 새문안교회, 언더우드 선교사의 인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이 시기 김규식은 언더우드 선교사를 도와 YMCA학관 경신학교 배재학당 등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교육 계몽운동에 힘쓴다. 당시 그는 여러 강연회에서 세계의 상황과 기독교인으로서 사회변화에 어떻게 이바지할 것인지를 연설했다. 1910년 장로로 피택된 그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새문안교회 및 장로교단 행사에 의욕적으로 참여했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국권침탈이 본격화되자 그는 1913년 활동 무대를 중국으로 옮긴다.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한 이 시기부터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기가 어려워졌다. 김규식은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 등 30여명의 청년혁명가와 의기투합해 우리나라 최초의 망명 정당인 ‘신한청년당’을 세운다.

이듬해 파리강화회의에서 대한독립을 천명하고자 신한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프랑스에 간 그는 이즈음부터 본격 외교전에 나선다. 회의장엔 들어갈 수 없었지만 파리에 ‘한국공보국’을 설치하고 회보를 발행해 ‘한국이 4200여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닌 주권국이며 일본의 식민통치로 기독교 박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각국 대표단과 언론에 알렸다.

37세 때의 김 장로 모습. 새문안교회 제공

제국주의가 횡행하는 시대에 약소국은 설 자리가 없음을 절감한 김규식은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 등과 독립운동을 모색한다. 하지만 동포 사회의 분열에 염증을 느껴 21년 중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후 중국과 몽골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일본 밀정의 추적과 암살위협에 시달렸다. 45년 광복 후 32년간의 해외생활을 접고 임시정부 부주석 자격으로 환국한 그는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독립운동 당시의 심경을 회고했다.

“해외 생활 30~40년 예배당 출석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하였다. 그것은 일본 밀정들이 우리 뒤를 따름이라. 이럴 때 예배당을 지나면서도 ‘내 아부지의 집’에 들어가 마음 놓고 예배 한 번을 잘 보지 못하던 우리들의 심정이 어떠하였으랴.”

그럼에도 김규식은 신앙을 돈독히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해방 후 한 교회 설교에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자.… 우리가 이 나라 건설을 위해 충성을 다한다면 하늘나라에서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리라”라며 애국심과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45년 11월 25일 새문안교회에서 한 특별설교에서 ‘한국교회의 통일과 일치’를 강조하기도 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지만 그는 좌우 합작을 추진한다는 이유로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50년 6·25전쟁 발발 후 납북돼 그해 북녘땅에서 외로이 순국했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은 서거한 지 40년 가까이 지난 89년 추서됐다.

윤 위원장은 “김 선생은 신앙심에 근거한 올곧고 자주적인 성향으로 독립운동과 민족통일에 앞장서신 분”이라며 “개인의 안위보다 민족과 나라의 앞날을 염려했던 선생과 신앙 선조들처럼 한국교회도 민족의 현안인 통일에 적극 나서길 바란다”고 말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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