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철 (4) 영어회화 안했으면 미아리고개 ‘정도령’ 될 뻔

우연히 친구 따라갔다 미국인 만나 며칠 만에 영어회화 책 통째로 외워…알아 듣지 못해 미군방송으로 공부

경기고 졸업앨범에 수록된 정철 이사장의 얼굴사진.

암자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정기적인 식량 조달이다. 마침 떨어진 식량을 조달하러 서울에 왔다가 길에서 고교 동창생을 만났다. 친구가 영어회화 연습을 하러 미군 장교를 만나러 가는 길인데 함께 가 보겠냐고 했다. 구경이나 해 보자는 생각으로 따라갔다. 그때 친구를 따라가지 않고 그냥 산으로 향했더라면 지금쯤 미아리고개 밑에서 ‘정도령 철학관’ 같은 걸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렇게 해서 난데없는 영어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존슨 대위라고 하는 노랑머리 미국인과 친구가 하는 대화를 듣게 됐다. 간단한 단어 몇 마디 외에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게다가 학창시절 나보다 영어를 못하던 녀석이 “너더러 미국에 가본 적이 있냐고 묻는 거야” “전공이 뭐냐고 하는데” 하며 통역까지 하는 걸 보면서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그래 두고 보자. 영어회화, 까짓것 일주일에 끝낸다’라고 다짐했다.

존슨 대위와 헤어진 뒤 서점으로 달려가 영어회화 책을 샀다. 며칠 동안 열심히 공부해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외웠다. 우리말을 보면 영어가 바로 튀어나올 정도로 외웠다. 웬만큼 자신이 붙자 친구에게 연락했다.

“야, 그 존슨 대위, 다시 한번 만나자”고 했더니 “열흘은 있어야 만난다”고 했다. 그사이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각 회화 문구에 번호까지 붙여가며 외웠다. 그리고 딱 보름 만에 다시 존슨 대위를 만났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외웠던 회화 예문들을 쏟아냈다.

존슨 대위는 놀라워했다. 한마디도 못 하던 내가 어쩌고저쩌고 영어로 말을 하니 신기해하면서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외웠던 말은 어떻게든 하겠는데 그가 하는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차 싶었다. 말하는 것만 연습했지, 듣기 연습을 안 했다. 그의 말을 알아듣고 싶었다.

사람들은 미군방송(AFKN)을 들으면 도움이 된다고 했다. 우리 집에는 TV가 없어서 라디오로 AFKN을 들었다. 1시간마다 5분 뉴스가 나왔고 6시와 10시에는 10분 뉴스를 방송했다. 뉴스를 듣기 시작했는데 ‘워싱턴’ ‘프레지던트’ 정도 단어 몇 마디 외에는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녹음기로 뉴스를 녹음해서 반복해 들으며 받아 적었다. 하지만 어떤 말은 100번을 들어도 안 들렸다.

나는 모르는 단어가 궁금해 영자신문을 찾았다. 해당 뉴스를 보면 단어가 나올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담은 기사 자체를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는 미군 태평양사령부가 발행하는 타블로이드판 신문인 ‘스타스 앤드 스트라이프스(stars and stripes)’를 구독하며 내용을 확인했다. 이런 식으로 1년 정도 지나자 AFKN 방송을 알아듣게 됐다. 할리우드 영화도 보러 다녔다. 역시 녹음기를 들고 가서 녹음을 해왔다. 종로 동대문 청량리 쪽에 미국영화 동시상영 극장이 있었다. 2개씩 3일간 상영하면 또 다른 영화로 바꿨다.

나는 매일 아침 극장으로 출근해 저녁까지 똑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봤다. 안 들리는 내용을 알기 위해 영화사까지 찾아가 대본을 구했다. 첫 대본은 영화 ‘애수(Waterloo Bridge)’였다. 비비언 리와 로버트 테일러가 주연한 전쟁 드라마였다. 못 알아들은 말을 대본으로 확인하니 어찌나 감격스러운지 눈물이 났다. 영화 대사 전체를 외웠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촬영=장진현, 영상 편집=김평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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