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일은 조선 사람이 다스려야” 초교파 독립운동 앞장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8) 오화영 목사와 종교교회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잠 27:6~7)

3·1운동 직후 민족대표 33인 중 1명으로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오 목사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화영 목사가 1924년 지인에게 붓글씨로 건넨 성경 구절이다. 3·1운동으로 수감돼 3년 2개월간 고초를 겪고도 변하지 않은 민족지도자로서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일제의 회유와 유혹을 멀리하고 신앙인으로서 신념을 지킨다면 언젠가 결실을 볼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담겨있다.

오 목사는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 판사로부터 “조선 독립운동을 이후에도 계속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기회만 있다면 할 것”이라고 답했다. 재판을 받던 일부 지도자가 일제의 서슬 앞에 머뭇거리거나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에 오 목사의 답변은 방청객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조국에 헌신한 기독인

천도교인으로서 동학운동에 참가했던 그가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구국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1879년 4월 5일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대촌리에서 태어난 오 목사는 어려서부터 전통 학문을 공부했고 동학에 입문했다. 당시 동학은 양반 중심의 사회질서와 지배계층의 수탈에 저항하는 민족적 운동이었다.

1894년 11월 관군과 일본군의 협공으로 동학군이 우금티 전투에서 패배하자 오 목사는 갈림길에 섰다. 전봉준 등 동학 지도들이 대거 체포되는 상황에서 10대였던 그는 만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종교의 한계를 느끼고 신학문을 찾던 오 목사는 1906년 5월 미국 남감리회 파송 선교사인 윌라드 크램에게 세례를 받고 개성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1918년 39세에 종교교회 최초의 한국인 담임목회자가 된 오 목사는 이듬해 역사에 남을 선택을 하게 된다.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한 것이다. 3·1운동은 오래전부터 기획된 것이 아니라 젊은 종교인들의 작은 신앙적 선택들에서 시작됐다. 1919년 3·1운동이 있기 13일 전인 2월 16일 오 목사는 정춘수 목사와 박희도 전도사로부터 천도교가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했다는 소식을 듣고 광복의 희망을 품게 됐을 때였다.

오 목사는 남감리회를 대표하는 목사로서 장로교 측 이승훈 장로와 미감리회 측 오기선 목사 등과 초교파적인 회합을 수차례 갖는다. 사흘 뒤인 19일에는 천도교와의 합작 방법을 논의했고 22일에는 기차를 타고 개성으로 가 지인들에게 3·1운동 동참을 권유했다.

개성에서는 동생 오은영을 만나 앞으로의 집안일을 부탁한다. 그는 조국 독립을 위해 장남의 본분까지 포기할 정도로 조국의 앞날을 걱정했다. 그는 거사 전날까지 수많은 기독교·천도교·불교 측 인사들과 교류하며 바삐 움직였다.

당시 종교교회는 서울 시내를 대표하는 교회 중 하나였다. 독립선언식이 열린 명월관(태화관) 기생 이난향은 훗날 오 목사를 기독교 대표로 표현했다. 하지만 오 목사가 민족대표 중 1인이 된 데는 정치적 목적이나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니다. 법정에서 그는 “정치에 대한 불평이나 불만은 아니고 조선의 일은 조선 사람이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며 간단하고 당연한 대답을 했다.

민족 일꾼 배출한 종교교회

오 목사의 신념은 담임했던 종교교회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성도들은 그가 수감된 후에도 그의 가족들을 계속 보살피고 돌봤다. 사택도 그대로였다. 출소 후에는 예전처럼 설교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그의 3·1운동 참여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오 목사의 민족운동을 곳곳에서 도운 성도는 김응집이다. 오 목사가 3·1운동으로 수감되고 5개월 뒤 김응집은 조선총독부가 독립운동가에게 내란죄를 적용한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을 담은 ‘국민신보’를 만들어 배포하다 체포됐다. 오 목사가 1927년 항일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할 때는 김응집도 함께했다. 1929년부터 2년간 신간회 경성지회 상무집행위원과 재정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33년에는 흥업구락부에서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힘썼다.

마태복음 9장을 묵상하다 찬송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지은 남궁억, 여성교육운동가로 덕성여대 전신인 근화여학교를 설립한 차미리사도 종교교회 성도였다. 1900년 배화학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시작한 교회는 1912년 교인 수 976명으로 성장해 민족의 대표 교회를 자부하게 됐다. 성도들은 배화학당 등을 중심으로 야학 교사를 자원하며 오 목사의 민족정신을 널리 퍼뜨리고자 힘썼다.

최이우 목사가 26일 서울 종로구 종교교회에 마련된 오화영 목사 사택 터 안내문 앞에서 오 목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최이우 종교교회 목사는 26일 “3·1운동이 오늘날 민족정신의 기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100년 전에는 누구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굳이 거창한 일이 아닐지라도 오늘날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민족을 사랑하며 행하는 작은 일들이 그 자체로 하나님의 큰 역사를 만드는 소중한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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