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철 (5) 나이 스물두 살에 ‘땜빵강사’로 학원가 입성

도사의 꿈 접고 영어 공부에 올인… 영자신문 읽으면서 번역도 연습, 새로운 학습법 고안해내며 공부

정철 이사장이 1978년 서울 망원동 자택 주변에서 아들 학영과 자전거를 타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일주일 정도면 끝날 줄 알고 시작한 영어 공부는 2년 이상 계속됐다. 지리산으로 돌아가 도를 계속 닦으려던 계획은 그렇게 미뤄졌다. 일주일만 영어회화를 공부해 친구에게서 받았던 수모를 되갚아주고 가려다가 발목이 잡힌 것이다. 나는 도사가 되려는 꿈을 잠시 접은 채 미친 듯이 영어 공부에 집중했다.



미군방송 라디오와 미국 영화로 듣기 연습을 하다가 영자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저 읽기만 한 게 아니라 몇 번 읽어본 뒤에는 보지 않고 기사를 써봤다. 영자신문의 기사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연습도 했다. 우리말 신문을 읽으며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새로운 영어공부 학습법까지 고안해내며 공부에 몰두했다.

미국 영화는 ‘애수’ 이후로도 몇 개의 영화 대본을 더 구해 통째로 암송했다. 서점에서 파는 게 아니어서 대본을 구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다. 영화를 수입한 회사를 찾아가 담당자를 불러내 밥을 사거나 담배를 찔러주고 대본을 구했다. “영어공부를 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읍소하면 대부분은 창고를 뒤져서 먼지가 쌓이고 누렇게 바랜 대본을 찾아다 줬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영어공부에 대한 욕구는 더 커졌다. 영어에 통달하는 원리가 있을 것 같아서 외국어학습에 관한 참고서적도 탐독했다. 열심히 하다보니 꽤 괜찮은 실력이 됐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영어공부 책으로 ‘영어정해’ ‘삼위일체’ 등이 유명했다. 나도 이 책들로 꽤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나중에 실제로 영어를 사용해보려고 하니 과거에 배웠던 잡다한 지식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40~50대가 된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성문기본영어’나 ‘성문종합영어’도 마찬가지다. 이 교재들의 특징은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과거 입시 선생들이나 학원가에선 최고의 영어 교재로 성문영어 시리즈를 꼽았는데 그 이유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랐다. 내용이 좋다기보다는 책이 어려워서 학생들이 혼자서 공부할 수 없고 학원에 와도 한 번 듣고는 잘 몰라서 몇 차례씩 재수강을 해야하니 학원 입장에서 좋은 책이라고 한 것이었다. 선생들이 영어 실력을 뽐내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배운 영어 교재들은 영국이 식민지 주민들의 엉터리영어를 바로잡기 위해 만든 까다로운 문법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런 내용이 일본에 전해졌다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로 넘어온 것이다. 엄격한 규칙을 앞세운 영어의 육법전서 같은 책들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자동차 운전법을 가르치는 책에 자동차 부속에 관한 사항만 잔뜩 들어있는 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했던 것들은 모두 접어두고 완전히 새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영어회화학원 원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갑자기 강사 자리가 비게 됐다며 한 달만 와서 강의를 해달라고 했다. 이른바 ‘땜빵 강사’였다.

나는 대학 졸업장도 없고 요즘으로 치면 무자격 강사였다. 하지만 당시는 영어를 조금만 해도 영어선생을 할 수 있던 때였다. 선뜻 해보겠다고 답했다. 내 나이 겨우 스물두 살이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촬영=장진현, 영상 편집=김평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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