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재다능한 많은 정치인들이 유독 갖추지 못한 능력은 바로 ‘은퇴할 능력’…
역할을 다해 내리막길만 남은 이들이 정치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고 있어
김두한과의 맞짱에서 패하자 종로 바닥을 떠난 구마적처럼 멋지게 물러나는 정치인 없나


#1. 2007년 한나라당에서 이명박과 박근혜의 경선이 한창일 때였다. 워낙 치열한 싸움이었기에 양쪽 다 한 표가 아쉬웠다. 당연히 이회창의 거취가 초미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양측에서 모두 이회창의 지지를 얻고자 기를 썼다. 당시 필자도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이회창 측근인 모 인사를 만났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너무 의외였다. 이회창이 세 번째 도전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두 차례나 대통령 근처까지 갔다가 아깝게 낙선한 그가 이번엔 가능성이 전무함에도 다시 도전한다니. 하지만 그는 실제로 세 번째 도전했고, 예상대로 낙방했다. 자존심이라면 하늘을 찌르던 이회창은 왜 은퇴한 정치판으로 다시 돌아왔을까. 속된 말로 쪽팔리는 건 참아도 외로운 건 못 참아서였을까.

#2. 최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범사회적 기구의 위원장직을 수락했다. 2017년 초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사실상 정계를 떠난 지 2년여 만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미세먼지 문제는 그 폐해가 날로 심각해 가는 반면, 그에 대한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상황이다. 이런 때 반기문의 위원장직 수락은 소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으로서는 골치 아픈 문제에서 일단 벗어나서 좋고, 반기문은 소일거리(?)가 생겨서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기문은 오랜 기간 항공모함을 타고 다니다가 이제는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다니다 보니 몹시 외롭고 쓸쓸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명분이 그럴듯한 자리를 제의받았으니 이게 웬 떡인가. 미세먼지 대책 기구는 용두사미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첫째는 중국과의 협조란 게 애당초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고, 둘째는 석탄 화력을 줄이자면 필연적으로 원전을 늘려야 하는데 그게 이 정부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3. 지난 4·3 재보선 와중에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는 같은 당 이언주 의원으로부터 ‘찌질하다’는 거친 비판을 받았다. 반문재인 투쟁에 나서야 할 야당 대표가 야당 표를 분산시키면서 오히려 자기 정치를 위해 여당을 돕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손학규는 웬만한 정치인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정치인으로서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본 사람이다. 4선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경기도 지사, 세 차례의 야당 대표, 세 차례의 대선 후보 경선, 두 차례의 정계 은퇴와 복귀 등등. 군대로 치면 한때 참모총장을 지냈던 분이 은퇴 후 다시 연대장급을 맡아 이동식 찻집 이벤트 등을 벌이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보기에 딱하다. 권력의지란 사람을 저렇게도 끈질기게 만드는 것인가.

#4. 서울지검장과 법제처장을 지냈던 송종의씨는 1998년 공직을 무사히 마치고 충남 논산으로 낙향해 평생의 꿈이던 밤나무 농사에 몰두한다. 한 해 밤 600가마를 수확하던 그의 영농법인은 300만 달러 수출탑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4년엔 천고법치문화재단을 설립해 매년 ‘정의로운 사회와 법치주의 확립’에 기여한 공직자에게 시상하고 있다. 2013년부터 3년 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역임한 이동필씨는 퇴임 후 경북 의성에서 밭농사를 지어 왔다. 그는 2018년 경북도가 공모한 농촌 살리기 정책자문관에 지원해 주 3일 21시간 근무하는 5급 상당 공무원으로 채용돼 연봉 3000만원쯤을 받는다. 교육부 장관을 두 차례 역임한 안병영씨는 강원도 고성에 정착해 과실수를 비롯, 고추 상추 같은 텃밭 농사를 짓고 있다. 그는 일찌감치 ‘인생 3모작론’을 역설해 왔다. 정년까지 열심히 일하고, 그 뒤 10년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을 하며, 그 후로는 자연 속에서 마음을 비우며 살자는 것이다.

원래 정치는 팔방미인이 하는 것이다. 그만큼 많은 자질과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지도자의 자질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다재다능한 많은 정치인들이 유독 갖추지 못한 능력이 있다. 바로 ‘은퇴할 능력’이다. 앞서 보듯이 박수받을 때 떠난 은퇴자들은 각자 나름대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말년을 보내고 있다. 그에 비해 아직도 많은 정치인들은 일반인들이 보기에 이미 그 역할을 다했고, 이제 그에겐 내리막길만이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미처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고 있다.

한국 영화의 거장 임권택 감독이 오래전 어느 잡지와 인터뷰한 얘기가 기억에 새롭다. 그 당시 ‘서편제’ 등 예술영화를 주로 만들던 그가 ‘장군의 아들’로 대히트를 치고 난 뒤였다. 기자가 그런 대중영화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또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강 이런 식으로 대답한 것 같다. “오랫동안 종로판을 주름잡던 구마적이 김두한과의 맞짱에서 패하자 바로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아우님, 내가 졌소. 이제 종로 바닥을 떠나겠소.’ 그런데 우리 정치판은 승부가 너무 분명치 않아요. 싸움에서 졌으면 후배에게 자리를 내주며 멋지게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정치판은 달라진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정두언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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