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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와 휴매너티] 밀레니얼 세대의 자아 정체성… 나는 알고리즘이다


인터넷과 함께 자라온 밀레니얼은 알고리즘에 의해 세상을 인식하고 사고를 형성하는 세대
그러나 거기엔 자유의지도, 주체성도, 인간의 존엄성도 없어


42. 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답변이란다. ‘은하수 여행을 하는 히치 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컬트풍의 SF영화에서 ‘깊은 생각’이라는 슈퍼컴퓨터가 750만년간 일한 끝에 내놓은 답이다. 실망한 인류가 “그런데 질문이 뭐였지요?”라고 물으니 슈퍼컴퓨터는 1000만년을 더 계산해야 42에 대한 질문이 나온다고 대답한다. 뿐만 아니라 이 연산을 위해서는 인류를 비롯한 지구 생물체들을 수치행렬로 사용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실행해야 한다고 했다.

우주와 나의 존재는 랜덤인가? 무작위로 생긴 우주에 그냥 내던져진 존재가 나일까? 여기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소위 우리나라 최고의 인재들이 모였다는 모 대학에서 지난주 특강을 했다. 감정소통 로봇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어떤 학생이 손을 번쩍 들어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인간에게 감정이 왜 필요한 거죠? 여러 가지로 거추장스럽고 오히려 없는 게 나을 때가 많은데요.”

나는 그 학생에게 되물었다. “그러면 학생은 무엇 때문에 사는 거지?” 능률을 추구하는 것은 이제 컴퓨터가 더 잘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소소한 개인적 행복 추구가 지상 목표인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내 질문은 교장선생님의 훈시처럼 따분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최근의 기술 동향이나 현상을 이야기할 때만 해도 관심을 보이던 250여명의 청중 중 절반을 나는 이 질문으로 잃었다. 당황스러웠다. 20대 청년들에게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꼰대 짓일까?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나는 몸과 감정이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를 밝혀내고 있는 최신 뇌과학 연구를 소개하고, 자신의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공감능력도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보여줬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 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학생들을 보며 필사적으로 19세기 중반의 한 유명 사례를 꺼냈다. 감정을 관장하는 뇌 부분에 손상을 입고 성격이 포악하게 변한 피니어스 게이지란 인물을 소개했다. 게이지는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회사에 갈지 말지를 정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고 한다. 감정의 이상은 결정장애를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쯤 되면 대부분의 어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그런데 20대 초반의 밀레니얼들에겐 먹히지 않았다.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뭐가 문제지? 왜 스스로 결정을 해야 하는데?’라는 표정으로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아뿔싸, 인간의 주체성이니 자기 결정권이니 하는 말을 내뱉는 순간 나는 꼰대임이 확정되고 말았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세대는, 뉴스는 페이스북이 가져다주고, 진실은 구글이나 네이버 검색이 알려주고, 아마존이 살 만한 것들을 알아서 대령하고, 넷플릭스가 볼 만한 영화를 가려주는 밀레니얼들이다. 게다가 인터넷은 정보의 홍수다. 감당할 수 없는 정보과잉은 또 다른 형태의 검열이나 마찬가지다. 플랫폼 기업들의 테두리 밖으로 가면 우주의 미아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이들에게 있다. 교과서와 참고서 몇 권 안에 모든 진리가 있다고 믿고 자란 우리 (꼰대) 세대와의 간극은 갤럭시급이다.

확정적인 세계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찾기는 그래도 할 만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비확정적인 세상에 살고 있는 밀레니얼에게 자아 정체성이란, 마치 오래된 신과 같이 낡고 퀴퀴하다. 어디에도 닻을 내릴 수 없는 이들은 자신과 세계에 관한 깊은 성찰보다는 트렌드와 가벼움을 선호한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만들어주는 소비에 집중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렇듯 밀레니얼들이 본질적인 질문과 스스로의 정체성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반면 플랫폼 기업들은 이들에 관해 매우 상세히 알고 있다. 이것이 문제일 수 있다.

페이스북 유저로부터 수확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인에게 맞춤형 메시지를 보내 선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악명이 높았던 케임브리지 아날리티카의 전 CEO 닉스는 이렇게 자랑하곤 했다. “페이스북 ‘좋아요’ 100개만 줘 봐. 우리는 당신이 어느 후보에게 투표할지 정확히 맞출 수 있어. ‘좋아요’ 300개면 당신의 배우자보다 당신을 더 많이 알 수 있어.” 과연 이 회사는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당선과 브렉시트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하지만 데이터 수집과정과 선거 개입과정에서의 불법과 비리 의혹으로 작년 문을 닫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페이스북과 구글, 그리고 네이버 등의 플랫폼 기업들은 우리가 남기는 수많은 데이터를 갖고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더 정교하게 다듬어가고 있다. 개인의 성격 프로파일링은 인공지능(AI) 기술의 발달로 나 자신보다 나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돼간다. 거기에 생체인식기술로 내가 미처 알기도 전에 기계가 나에 관해 먼저 알아버리고, 알리고 싶지 않은 나의 정보까지 온전히 시스템에 노출되고 만다. 소위 ‘감시 자본주의’ 시대의 개인의 정체성은 기술자본에 의해 형성돼 가고 시장의 필요에 의해 진화해 가고 있다.

인터넷과 함께 자라온 밀레니얼의 자아 정체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알고리즘이다. 알고리즘에 의해 세상을 인식하고, 사고를 형성하고,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리즘에는 두 가지만 있다. 세상 만물이 돌아가는 어떤 룰(함수)과 나머지는 오류항이다. 룰은 기계가 만들고 거추장스러운 인간의 감정은 미처 프로그램화되지 못한 오류일 뿐이다. 거기에는 자유의지도 주체성도 그래서 딱히 인간이 존엄하다고 할 어떤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점점 기계와 닮아가고 있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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