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 용서] “너의 잘못을 잊어 줄게”

픽사베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친구나 연인 가족 또는 직장 동료 등에게 상처받은 경험이 있다. 상처의 깊이는 저마다 다르지만 누군가에게 용서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다. 우리는 상처를 받은 만큼 돌려주길 원한다. 내게 잘못을 한 누군가를 위해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 사실 어려운 일이다. 심리학자들은 평생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죽이고 싶은 복수심을 품고 살아갈 때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고 말한다. 분노는 내면을 병들게 하고 육체적인 질병의 큰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나를 위한 선택

미국 스탠퍼드대 ‘용서 프로젝트’ 설립자인 프레드 러스킨 박사의 저서 ‘용서’에 의하면 용서란 나를 상처 입힌 사람의 무도한 행위를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놓아주고 현재를 치유하기 위해 내가 내린 선택이다.

용서에 대한 오해가 용서를 더 어렵게 만든다는 지적도 있다. 용서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내게 한 행동이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당한 일을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상처 준 사람과 화해하라는 것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또 “괜찮아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당신의 마음을 다치게 한 사람의 무례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슬쩍 눈감아주는 것도 용서가 아니다. 모욕받으면서 괜찮다고 하는 것 역시 용서의 참뜻이 아니다. 용서란 개인적으로 공격받았다는 느낌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용서란 이미 일어난 나쁜 일이 비록 나의 과거를 망가뜨렸을지언정 오늘과 미래는 결코 파괴할 수 없다는 ‘힘찬 자기 선언’이다.

쓴 뿌리, 분노, 슬픔 등의 감정들을 쉽게 바꿀 수 없다. 그리스도 앞에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목회자들은 용서는 우리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단 용서하기로 선택했다면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용서를 경험하면 내 안의 닫혀 있는 자유의 문이 열리며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평안과 관용, 자비가 샘솟듯이 밀려 온다.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이 거짓말처럼 이해되고 용서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울화나 아픔의 포로가 돼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 없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18~19절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이미 우리 죄를 용서하셨고 그 용서를 우리에게 거저 베푸신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분의 용서를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도록 우리를 만드셨다. 예수님은 이 조건을 거듭 강조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브라질 아마존 바나와 인디오 부족들에게 ‘용서’란 ‘누군가의 잘못을 더 기억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성경 번역을 위해 이들과 20년간 함께 살아온 강명관 선교사는 이들에게 용서는 “너의 잘못을 잊어 줄게” “너의 잘못을 더 기억하지 않을게”란 뜻이라고 설명한다. 강 선교사는 “진정한 용서란 우리의 죄를 더 기억하지 않겠다는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의 의미를 바나와 인디오 부족들에게 배웠다”며 “상대의 잘못을 여러 번 기억하며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기억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때로 자신을 용서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자기 용서가 필요한 네 가지 유형’이 있다. 인생의 결정적인 과제를 수행하는 데 실패한 사실 때문에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 꼭 필요할 때 자신이나 남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지 않은 일로 마음이 불편한 사람, 남을 상처 입힌 일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 약물중독이나 일 기피증 같은 자기 파괴적인 성향 때문에 자신에게 화를 내는 사람이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단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하기 어렵고 다음 단계로 성장하지 못한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경우가 그랬다.

라파엘로(Sanzio Raffaello, 1483~1520년)의 ‘베드로에게 양 떼를 맡기시는 예수’.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소장.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호숫가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기적적으로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신 후 베드로에게 양 떼를 맡기셨다. 왼쪽에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양 떼들이 묘사돼 있으며 오른쪽에는 무릎을 꿇고 천국의 열쇠를 가슴에 안고 있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용서의 복음

베드로는 패잔병의 심정으로 낙향해 다시 고기잡이배를 탔다. 빈 그물을 올리며 한숨 쉴 때 해변에서 누군가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말했다. 그 순간 3년 전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을 만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얼굴이 뜨거웠다. 예수님을 부인한 죄를 통곡하며 회개했으나 주님을 뵐 면목이 없다.

예수님은 용서를 통한 치유상담을 행하셨다. 제자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치유하기 위해서 기억을 드러낼 수 있는 과정이 필요했다. 예수님은 디베랴호숫가에 모닥불을 피우고 떡과 생선을 준비해 놓고 제자들을 기다렸다. 베드로는 “도대체 예수님은 왜 이러시는 건가”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주님을 만난 순간부터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떡은 주님과 나누었던 마지막 만찬을, 모닥불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가야바 집 뜰에 피워졌던 모닥불을 또렷하게 떠올리게 했다.

예수님은 수난과 십자가 사건에 참여하지 못한 제자들을 비난하지 않으셨다. 평화의 인사로 제자들을 포옹했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 땅의 일을 제자들에게 위임했다. 베드로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명령을 따를 수 없었다. “주님 저는 제자 될 자격이 없습니다. 차라리 질책하고 꾸짖어 주세요”라고 말하고픈 심정이었다.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씩이나 물으셨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세 번 대답했다.(요 21:15~17) 신학자들은 예수님이 동일한 질문을 세 번 한 것은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마음을 다독이시기 위해서였다고 해석한다. 양심의 가책이란 사슬에서 베드로를 해방시켜 주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잘못을 ‘용서’해 준 것을 넘어 ‘속죄’해 주셨고 “내 양을 치라”고 하셨다.

지금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기도처럼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보다 주님께서 어떤 죄를 용서해주셨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길을 잃고 헤맸는지가 아니라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해주셨는지를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이 되길 바란다.

용서에 하나 더

용서로 얻는 가장 큰 유익
과거에 희생되지 않는 것


용서는 강요될 수 없는 선택이다. 우연히 일어나는 경우는 없다. 우선 용서해야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한다. 프레드 러스킨은 용서가 이뤄지려면 세 가지 조건이 채워져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발생한 일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둘째,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고통을 일으킨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면 비슷한 상황에서 거듭 상처를 입을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셋째, 믿을 만한 친지 서너 사람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한다. 만약 이야기를 털어놓을 만한 사람이 없다면 심리 상담가를 찾는다. 이마저 여의치 않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일단 종이에 쓴 후 나중에 읽어본다. 러스킨은 이 세 가지 조건이 채워지지 않았다면 용서를 서두르지 말라고 권면한다.

내가 괴롭힌 사람이 나를 용서할 때 양심의 가책이 만들어 내는 무지근하고 옥죄이는 두근거림에서 벗어나게 된다. 또 나를 괴롭힌 그 사람을 내가 용서할 때 쓴 뿌리로 참담하게 좀먹은 마음과 상처 입은 자존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결국 용서는 양쪽 모두에게 내면의 평화와 서로의 존재감으로 인해 기뻐하는 자유를 준다. 무엇보다 용서를 통해 우리가 얻는 가장 큰 유익은 이제 더 과거에 희생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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