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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운동 세계에 알린 석호필… 조국 독립 외친 ‘세브란스의 33인’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10) 스코필드와 세브란스

여인석 연세대 의대 의사학과 교수가 지난 4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3·1운동 당시 해부학 실습실에 독립선언서를 숨긴 장면을 담은 기록화를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1919년 3·1운동 당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균학 교수였으며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최연소자였던 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 이갑성 남대문교회 집사(국민일보 2월 21일자 31면 참조)에게 거사 일정을 전해 듣고 서울시내 만세시위 현장을 직접 촬영해 세계에 알렸다. 그해 4월 일제가 경기도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에서 양민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학살하자 현장으로 달려가 참상을 촬영하고 관련 보고서를 남겨 일제의 잔학무도함을 고발했다. 소아마비 장애가 있는 몸으로 서양인 그 누구보다 거세게 일제에 항거한 의학자이자 선교사였던 프랭크 W 스코필드(석호필·1889~1970) 박사 이야기다.

스코필드 박사가 잠들어 있는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지난 9일 찾았다. 한강과 동작대교를 굽어보는 애국지사묘역 96번이 그의 무덤이다.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힌 외국인은 단 3명이다. 그중 2명은 6·25전쟁 당시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화교로 동양인이다. 서양인으로는 스코필드 박사가 유일하다. 그의 묘비엔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 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 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주세요”란 유언이 새겨져 있다.

스코필드 박사가 촬영한 제암리 학살 현장.



도와주던 소년 가운데 한 사람이 정운찬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다. 정 총재는 지난 4일 서울대 수의대에서 열린 추모기념식에 참석해 “박사가 내주신 학비로 중·고교를 다녔다”면서 “박사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일 뿐만 아니라 한없이 자상하고 따듯한 은인”이라고 말했다.

정 총재는 앞서 연세대 의학사연구소가 엮은 ‘세브란스인의 스승, 스코필드’란 책에 기고한 글에서 “박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나에게 친아버지나 다름없었다”면서 “영어 성경 공부를 비롯해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의 대부분을 그에게서 배웠다”고 회고했다. 특히 “약자에겐 비둘기 같은 자애로움으로, 강자에게는 호랑이 같은 엄격함으로 대하라는 가르침이 생각난다”고 전했다.

세브란스의전 시절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

석호필(石虎弼)이란 한국 이름은 스코필드 박사가 스스로 지었다. 한국과 한국인을 위한 바위와 같은 우직함(石), 불의를 참지 않는 용맹함(虎), 그리고 따듯한 배려와 도움(弼)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강대국들로부터 고립돼 고난을 겪은 한국인을 사랑했던 근면한 영국계 캐나다 이주민이었다. 목회자였던 선친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어 한 기독교인이었으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한국에 자원한 선교사였다.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간절히 추구하다 일제에 의해 20년에 쫓겨나지만, 해방 후인 58년 국빈 자격으로 돌아와 서울대 수의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다 70년 별세했다. 생전인 68년 독립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운동으로 훈장 포장 표창 등을 받은 세브란스 구성원은 총 33인이다. 세브란스의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를 만하다. 교수 학생 간호사 직원 등 전체 직군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했다. 여인석 연세대 의대 의사(醫史)학과 교수는 “54년 독립장을 받은 세브란스의전 설립자 올리브 에비슨 선교사를 포함해 다양한 직군의 의료기관 종사자들이 한마음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된 데는 세브란스 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세브란스병원 지붕 바로 아래의 옥탑방인 해부학 실습실에서 독립선언서와 유인물이 비밀리에 제작·보관됐다. 경남 김해 출신 배동석은 김해 마산 함안 등의 3·1운동을 주도해 학생 가운데에선 드물게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21년 숨졌다.

송영록은 개성 만세운동을 조직했고, 김병수는 고향 군산으로 독립선언서를 전달해 전북 최초 만세시위를 촉발했다. 충남 공주의 양재순, 경북 안동의 이주섭, 평양의 곽권웅, 평북 선천의 고병간이 세브란스 출신으로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세브란스 간호사들은 19년 3월 5일 당시 병원이 있던 남대문 정거장 앞 만세시위에서 일경의 총칼로 다수의 부상자가 생겨나자 붕대를 들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정숙 노순경 박덕혜 이도신 김효순 박옥신 윤진수 이성완 이아주 장윤희 체계복 등이 체포됐다. 이들 대부분은 이후 김마리아 선생(국민일보 3월 14일자 31면 참조)이 주도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참여해 독립운동가 옥바라지와 독립자금 모금 등을 도왔다.

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세브란스 졸업생들이 활동한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 1회 졸업생이자 김구의 손위 동서였던 신창희는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을 도우며 임시정부 군의와 대한적십자회 상의원으로 활동했다. 역시 1회 졸업생인 주현측은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를 역임했다. 그는 18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후배 신현창과 함께 삼일의원을 개원해 병원 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했다.

여 교수는 “세브란스는 선교사들이 시작했지만, 이후에는 한국 사람이 주체가 돼 한국 사람들을 돌봤기에 한국인의 주체적 활동을 막는 일제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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