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효숙 (2) 학창시절, 불공평한 세상 보며 탈출 꿈꿔

네 자매 중 늦둥이 막내딸, 부모·언니와 나이 차 많아… 어려서부터 자립생활 익혀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재학 시절, 과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그 시절 강 이사는 세상에 불만이 많은 청춘이었다.

나는 1952년 네 자매 중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났다. 엄마 나이 마흔, 아버지가 쉰둘일 때였다. 아들을 기다리던 엄마는 “얜 꼭 아들인 줄 알았는데…” 하며 늘 아쉬워하셨다. 그런 엄마를 보며 어려서부터 아들 노릇 해드리고 싶다는 마음의 씨앗이 심긴 것 같다. 아버지는 사람을 좋아하셔서 손님이 자주 집에 오셨다. 정갈한 개성 손맛의 엄마표 술상이 차려지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막내딸 자랑을 늘어놓으셨다. 술상에만 오르는 진귀한 안주를 냉큼냉큼 집어 먹는 날은, 내 잔칫날이요 큰 즐거움이었다.

58년 서울교대부속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젊은 부모들이 교육에 열을 올리며 과외를 시키기 시작하던 때였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특히 아버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딸이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건강하게만 자라주기를 바라셨다. 엄마가 공부 얘기를 하시면 아버지는 “공부는 무슨 공부냐”며 일찍 자라고 불을 꺼주셨다.

학부모 모임이 있던 날, 한복을 입고 쪽을 찐 우리 엄마와 굽실굽실한 파마머리에 양장을 차려입은 친구들의 엄마는 아주 달랐다. 나이가 많은 부모가 창피하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엄마에게 학부모 통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큰 언니와 무려 15살, 셋째 언니와도 8살 차이라 언니들과 의논할 처지도 못 됐다. 가족과 의논하지 않고 혼자 결정할 때가 많아졌다. 좋게 생각하면 어려서부터 독립적으로 사는 법을 배운 것이다.

이화여중과 이화여고를 다녔다. 중3 때 아버지가 중풍을 앓다 돌아가셨고 언니들도 하나둘 결혼해 집을 떠났다. 겨울이면 아랫목은 따뜻해도 코는 시린 행당동 한옥에서 엄마와 둘이 살았다. 내 눈에는 거대한 듯 보이는 번듯한 양옥집에 자기 방을 가진 친구들의 집을 드나들며 빈부차에 눈을 떴다. 그때는 또 치맛바람이 세서, 교사가 자기 학교 학생을 과외수업하기도 했다. ‘이건 공평하지 않은데…’라는 생각에 그런 선생님들을 우습게 보면서 사춘기의 반항심을 키웠던 것 같다.

불공평한 세상을 보며 기자의 꿈을 키웠다. 그러면서도 공부는 싫었다. 시험 과목이 가장 적은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 원서를 넣고 보니 경쟁률이 8대 1이나 됐다. 입학 원서를 내러 갈 때만 해도 학교 앞길은 진흙밭이었다. 그런데 시험을 치러 가서 보니 어느새 신촌로터리에서 대학 정문 경비실 앞까지 아스팔트가 깔려 있었다. 입학한 후에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강대에 입학해 그랬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었다.

1970년대 유신시절 캠퍼스의 현실은 답답했다. 낮엔 시위하고 밤엔 야학에서 가르치고 마르크스를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어느날 어제 같이 자장면을 먹던 누군가 잡혀갔다는 소식이 들리던 시절이었다.그래도 이튿날이면 어김없이 또 시위가 벌어졌다. 지금 돌아보면 시대는 참 암울했지만, 청년들이 태웠던 열정은 불꽃처럼 아름다웠다. 하루하루 생존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위도, 연애도 다들 뜨겁게 했던 것 같다.

나의 꿈도 바뀌었다. 기자가 아니라 이 나라를 떠나 어디론가 도망가는 것이 꿈이 됐다. 프랑스나 미국 영화를 보고 나면 나도 저렇게 넓은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영화는 사춘기 시절부터 나의 반항의 수단이자 유일한 탈출구였다. 나는 땋은 머리를 풀고 언니 옷을 훔쳐 입은 채 대학생인 양 영화를 보러 다녔다. 그레고리 펙이 기자로 나왔던 ‘로마의 휴일’은 여섯 번도 넘게 봤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현실 속의 내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느껴졌다. 꽉 눌려 있던 나는 훨훨 날아가는 꿈을 자주 꿨다. 어떻게든 떠날 길을 찾기로 했다.

정리=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