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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 기자 성기철의 수다] 10000일 만의 결혼 기념


27년5개월 만의 사랑 이벤트 값비싼 금빛 보석도 좋겠지만
따뜻한 노래 한 곡이면 어떤가 20000일 챙기려면 건강 필수


신접살림 차린 지 불과 1주일. 새색시가 조심스럽게 남편 직장으로 전화를 건다. “지금 엄마한테 와 있어요. 엄마가 맛있는 거 해주신다는데 이쪽으로 퇴근해서 같이 저녁 먹고 집에 가요.” 달짝지근한 제안에 남편의 대답은 엉뚱하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명색이 남자가 어떻게 처갓집으로 퇴근을 해. 나 우리 집으로 퇴근할 테니 알아서 해.” 이 남편, 31년 전 바로 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난 앞뒤, 아니 전후좌우 사방이 꽉 막힌 젊은이였다. 조상제사와 산소관리를 천금같이 여기는 유교 집안에서 자랐다지만 남들보다 상태가 좀 심했던 것 같다. 서울로 시집가는 누나한테 여필종부(女必從夫) 강조하는 어른들 밑에서 성장했으니 가부장적 사고가 뼛속 깊이 배어 있었다고 봐야겠다.

이런 사람이 결혼기념일 기억해서 챙길 리 만무하다. 결혼을 기념한다는 개념 자체가 머릿속에 없었을 게다. 15년쯤 되던 해 기어코 사달이 나고 말았다. 아침 식사 도중 “그런데 말이야. 결혼은 남녀 같이 하는데 왜 남편만 아내한테 이벤트를 준비하고 뭘 선물하고 그러지”라고 한 것. 별 생각 없이 한 말인데 아내가 발칵 했다. “왜 갑자기 그런 소릴 하는 거요. 내가 결혼기념일 기억 안 하냐고 단 한 번이라도 말 한 적 있나요. 결혼기념 외식하자고, 또는 이벤트 해달라고 한 번이라도 말한 적 있나요. 그런데 왜 엉뚱한 소릴 하냔 말이에요.”

갑작스러운 공격에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뻘쭘하게 서 있던 기억이 선명하다. 기념일 같은 거 잘 챙긴다는 직장 선배 조언으로 집에 꽃바구니 배달을 함으로써 너무 손쉽게 위기를 넘겨서 그런지 그때뿐이었다. 이후에도 결혼기념일은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27년을 넘겨 내게는 아주 의미 있는 결혼기념 이벤트를 하게 됐다. ‘10000일 기념식.’ 딸아이들과 대화 중에 결혼한 지 만일이 곧 다가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큰맘 먹고 행사를 준비했다. 만일은 대략 27년5개월에 해당된다.

자그마한 목걸이를 사고, 장문의 감사편지를 썼다. 아이들은 만일 동안의 스토리를 엮어 축하 동영상을 만들어줬다. 오랜만에 고급식당을 예약해 근사하게 식사까지 하고 나니 더없이 좋았다. 사실상 처음 해보는 결혼기념 행사인데 그다지 어렵지도 않고 어색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그리 무심하게 살았는지….

결혼기념은 서양 기독교 문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19세기 기독 국가에서 결혼한 날에 맞춰 매년 축하 예배하던 데서 비롯됐단다. 결혼기념엔 역시 선물이 관심이었나 보다. 유럽에선 1주년에 지혼식(紙婚式)이라 해서 부부가 서로에게 종이로 된 선물, 즉 책이나 그림 따위를 선물하는 게 관행이었다.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연수가 쌓여 선물이 보석으로 바뀌면서 25주년 은혼(銀婚), 30주년 진주혼(眞珠婚), 40주년 녹옥혼(綠玉婚), 45주년 홍옥혼(紅玉婚), 50주년은 금혼(金婚)이라 불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부터 금혼식을 챙기는 사람이 많아졌다. 60주년을 축하하는 회혼례(回婚禮)도 가끔 볼 수 있다.

성기철 경영전략실장 겸 논설위원

결혼기념 이벤트에는 정형화된 답이 있을 수 없다. 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가족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면 그만이다. 두 사람에게는 어떤 방식이라도 나름 특별하기 때문이다. 부부 서로 ‘감사의 삼배(三拜)’를 해보면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단다. 그럼 나는? 내주 결혼기념일을 기해 고향집 전화번호인 아파트 출입문 비밀번호라도 결혼 날짜로 바꿔볼까.

결혼기념의 완결판은 역시 리마인드웨딩 아닐까 싶다. 턱시도 양복에다 웨딩드레스 입으면 쑥스럽지만 색다른 느낌이 들 것이다. 그렇게 차려입고 사진이라도 한 번 찍어보면 어떨까. 최근 탤런트 최민수가 신혼여행 갔던 사이판에서 리마인드웨딩을 했단다. 최민수가 “25년 전에 했던 결혼식은 리허설이었던 것 같다. 25년간 연애하고 이제 진짜 결혼식을 한 것 같은 느낌”이라 말했다는데 공감이 간다.

선물은 뭐가 좋을까. 10000일 기념일에 목걸이를 준비하며 보석이란 걸 처음 생각해봤다. 백화점 보석상에 갔더니 가격이 왜 그렇게 비싸고 천차만별인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석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음에도 마음에 드는 건 비싸고, 저렴한 건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역시 ‘보석=돈’인가 보다 하는 느낌이었다. 보석 제대로 선물하려면 비자금 통장이 필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니 세상 많이 배운 셈이다. 직후 아내가 대충 짐작하는 비자금 통장을 만들긴 했다.

보석보다 더 값진 선물은 마음이 담긴 편지 아닐까 싶다. 손으로 쓴 편지면 더 좋겠다. 오글거리는 표현으로 감사의 뜻을 담아도 되고, 앞으로의 다짐을 적는 것도 괜찮겠다. 따뜻한 노래나 시도 생각해봄 직하다. 이장희가 부른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나직하게 들려주는 건 어떨까.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내 사랑을.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 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제목이 비슷한 칼릴 지브란의 연시는 언제 들어도 좋다. “나 그대에게 아름다운 이름이고 싶네. 차가운 바람 속에 그대 서 있을 때라도 그대 마음 따뜻하게 채워드릴 수 있는 그대의 사람이 되고 싶네. (중략) 그렇게 우리 서로의 가슴 안에 가장 편하고 가까운 이름이 되어 변하지 않는 진실로 그대 곁에 머물고 싶네.”

10000일을 기념했으니 20000일도 기념해야 할 텐데, 나이 계산해보면 대략 83세가 된다. 그때까지 해로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당장 술 줄이고 운동량 늘려야겠다.

성기철 경영전략실장 겸 논설위원 kcs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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