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이데올로기 총탄에 쓰러진 소녀 고아들의 대모

교육 선교사 에델 와고너와 연세대 언더우드 사택

1920~1950년대 초까지 한국에서 교육선교사로 활동한 언더우드 2세·에델 와고너 부부의 서울 연세대 사택의 현재 모습. 지금은 언더우드가(家) 기념관으로 개방되어 있다. 에델은 이 집 현관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총탄 피격으로 별세했다.

에델마을은 주일이라 그런지 조용했다. 지상 3층 총면적 1488㎡의 심플한 건축물이었다. 건물 현관 입구에 ‘에델마을’이라는 한글 간판, 오른쪽에는 ‘ethel village’라고 표기되어 있다. 우측 2층 베란다에는 생활 자전거 서너 대가 눈에 띈다.

에델 와고너 (1888~1949)

에델마을은 연세사회복지재단이 운영하는 법인으로 서울 구로구 천왕동에 자리한다. 아동 50여 명이 공동체 생활을 한다. 미취학 아동이 절반이다. 지난 7일 주일 2부 예배를 끝내고 버스 환승 끝에 에델마을 건너편 정류장에 내렸다. 일대가 작은 규모의 신도시였다. 예상 밖이었다. 이 마을은 1948년 선교사 언더우드 2세(원한경·1890~1951)의 부인 에델 와고너가 설립했다. 그 당시 서울역에 무연고 상경 소녀들이 많았다. 에델 여사가 서울 용산구 청암동 136번지에 2층 벽돌 건물을 사재를 털어 마련하고 7명의 소녀를 수용해 구제 사업을 시작했다.

언더우드가 기념관 1층의 고종 하사검을 설명하는 옥성삼 연대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언더우드 2세와 조선에서의 사랑

이틀 뒤. 서울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연신원) 뒤편 언더우드가 기념관을 찾았다. 연신원 옥성삼 책임교수의 안내로 캠퍼스 내 아펜젤러관 언더우드관 스팀슨관 한경관 핀슨관 등의 건물투어를 하고 난 직후였다. 숲길을 오르자 아래쪽에 반듯하고 아담한 석조 건물이 펼쳐졌다. 정원이 깔끔했고 마당 한쪽에 미국식 주차장이 있었다.

1940년대 찍은 사택(위). 아래는 6·25전쟁으로 폭격을 맞아 파손된 사진이다.

언더우드가 기념관은 1926년 건립된 원한경·에델 부부의 서양식 주택이다. 원한경은 ‘한국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원두우·1859~1916)의 장남으로 태어나 교육선교사가 되어 평생을 이 땅에서 살았다. 부부는 결혼 10년째였던 해 연희전문학교 사택인 이 집을 완공하고 입주했다. 집 앞에 돌다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수량이 풍부한 숲속의 집이었다. 원한경이 에델을 만난 것은 1912년 무렵이다. 에델은 미국 미시간주 킹스턴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대학 졸업 후 선교부 추천으로 한국에 파송됐다. 미 장로회가 한국외국인학교에 파송한 첫 선교사다.

원한경은 부모의 뜻에 따라 미국 유학을 가서 1912년에 뉴욕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한국에 돌아와 경신학교와 연희전문학교에서 영어 강의를 했다. 이들은 공사석에서 자주 만났고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서로 고백하지 못했다. 에델이 1916년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게 됐다. 선교사 가족들이 에델의 송별식을 해주었고 원한경도 참석해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인 줄 알았다.

한복을 차려입은 부부와 큰아들 원일한. 언더우드 2세, 3세 등은 한국이 고향이다.

하지만 원한경은 에델이 떠난 후에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원한경은 부산을 거쳐 현해탄을 건너 일본 시모노세키까지 뒤따라가 사랑을 고백했다. 에델은 “왜 이제서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너무해요”라고 울먹였다. 그해 12월 두 사람은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원한경은 아버지 대를 이어 연희전문학교 부교장, 교장서리, 교장 등을 역임했다. 에델은 1917~1929년 사이 4남 1녀를 차례로 낳았다. 사택 입주 전 원한경이 뉴욕대에서 철학박사 과정을 할 때 교육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러면서도 일본 제국주의에 신음하는 조선의 현실을 간증으로 미국인에게 알렸다. 에델은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 이화여전에서 심리학과 가정학을 가르쳤다. 한국어 사용이 금지됐으나 열심히 한국어를 배워 유창하게 구사했다.

언더우드가 사택 지하 기도실. 언더우드 2세 부부가 너무나 좋아했던 공간이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 지하에 기도실이 있는 아름다운 사택을 두고 한국을 떠나야 했다. 태평양전쟁과 함께 일제가 선교사들을 탄압했고 원한경은 연희전문학교 교장직에서 축출됐다. 1941년 원한경은 큰아들 원일한과 함께 외국인수용소에 감금됐다. 에델과 다른 자녀들은 사택에 감금됐다. 그리고 이듬해 강제추방 당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1945년 8월 15일 조선 민중에게 선물과 같은 해방을 주었다. 부부는 한국 선교 사역을 위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앞서 원한경은 1944년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원한경은 해방 후 미 육군성 한국어 통역관 자격으로 들어와 미 군정청 문교부장 고문 등으로 활약했다. 에델은 해방 후 미군 구호물자 배급 책임자가 되어 가난에 허덕이는 한국민을 돌봤다. 옷가지를 나누었고 우유 보급소를 차려 기아 선상의 어린이를 구했다. 더불어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강의를 했고 ‘교수 부인들의 모임’을 조직해 말씀을 나누었다. 서울역에서 배회하는 소녀들을 보살피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서울 청암동 기독교여자절제소녀관(현 에델마을 전신) 사람들의 1959년 기념사진.

‘모윤숙 저격 실수’… 보도 통제

1949년 3월 17일. 좌우대립이 극심했다. 삼일절 행사를 좌우 진영이 남산과 서울운동장에서 각기 개최했고 충돌로 이어져 경찰이 발포하고서야 수습됐다.

‘20여 명의 교수 부인들이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보니 한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무조건 방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우겼고…옥신각신했다. 소란한 틈을 타 또 한 명이 어느새 뒷문으로 들어와 어머니를 향해 뒤에서 총을 쏘았다. …어머니는 백낙준 총장 부인의 차로 세브란스로 옮기는 도중 운명하고 말았다.’(1982년 원일한 신문연재 회고 중)

에델 피살은 연희대학(연희전문학교 후신) 민주학련위 위원장 등 공산 학생 간부 3명의 짓이었다. 보도가 통제됐고 3일 후에야 ‘금해 게재’됐다. 뉴욕타임스는 즉시 보도했다. 국내 언론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모윤숙 저격이 목적이었으나 실수로 에델 죽인 것’이라고 했다. 범인들은 닷새 후 잡혔다. 영결식은 22일 새문안교회에서 학교장으로 치러졌다. 영구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됐다. 배민수 목사 등 그날을 겪은 이들은 “기독교인 등 수천 명의 사람이 거리에 나와 눈물을 흘렸고 운구 행렬로 교통이 차단되어 마치 국장을 치르듯 했다”고 회고했다.

에델 피살은 전쟁으로 가는 묵시이기도 했다. 이 해에 에델을 시작으로 김구 등 많은 이들이 피살돼 ‘암살의 해’로 기록됐다. 에델 피살을 두고 공식적으로 친일·친미의 모윤숙 저격설로 굳어졌으나 미 군정에 호의적인 원한경 부부 저격설, 미 군정의 이승만 제거에 불안을 느낀 이승만의 암살 배후설 등이 돌았다. 원일한은 회고담에서 이러한 설을 모두 부정하고 “공산당이 사회 혼란을 노린 것으로 생각한다”(1982년)고 했다.

서울 천왕동 ‘에델마을’ 전경. 1969년 청암동에서 이전했으며 2012년 신축했다.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던 순결한 영혼은 집 현관에서 허무하게 숨을 거두었다. 청암동 소녀들은 어머니를 잃었다. 당시 한국 교계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건”이라고 분노했다.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했다. 다시 천왕동 에델마을. 소녀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의 복선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사건을 소녀들은 모를 것이다.

글·사진=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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