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계열 영화배급사가 정부 출자 펀드와 ‘이면 계약’을 맺고 자사 제작 영화에 수십억원을 부당하게 투입했던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나랏돈을 흥행 실패가 예상되는 영화에 끌어들여 손실을 보전하는 것이 관행이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정부는 5년여 전 이 같은 부당 거래를 적발하고 정부 출자 펀드의 대기업 영화 투자를 금지했다가 올 들어 이를 다시 허용하기로 했다. 대형 배급사들의 거듭된 민원이 결국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2014년부터 CJ ENM 사외이사로 있던 박양우 중앙대 교수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직행한 것과 맞물리면서 영화산업의 대기업 독식 현상이 강화될 수 있다는 영화계의 우려가 다시 커지고 있다.

국민일보가 16일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창업투자회사 현장 검사 결과 통보’ 및 ‘투자조합 운영 합의서’ 등을 보면 오리온그룹 계열의 영화배급사 쇼박스는 2013년 미시간글로벌컨텐츠투자조합3호(이하 투자조합) 측과 100억원의 투자금을 받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했다. 쇼박스가 해당 펀드에 50억원을 출자하면 그 2배인 100억원을 투자조합에서 쇼박스 제작 영화에 투자하는 내용이었다. 쇼박스 측은 자사가 제안한 영화는 무조건 조합의 투자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독소 조항’도 넣었다. 영화계에서는 서류상으로는 정상적인 투자심의위원회를 거쳐 투자한 것처럼 포장해놓고 뒤로는 대기업 투자 영화에 자금을 몰아주도록 하는 구조였다고 설명했다.

중소기업청(현 중소벤처기업부)은 2013년 10월 현장검사를 벌여 “투자조합이 특정 출자자와 불합리한 협약을 체결했다”며 투자조합에 경고조치를 내렸다.

특히 해당 투자조합에는 모태펀드로부터 수혈받은 예산 45억원이 투입됐다. 예산 편법 전용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모태펀드란 정부가 규모가 작은 중소벤처기업 지원을 목적으로 만든 ‘국가 펀드’로, 정부 부처들은 이 펀드를 통해 투자조합과 같은 자(子)펀드에 자금을 공급한다. 문체부와 영화진흥위원회도 콘텐츠 제작 지원을 위해 매년 1000억원 이상을 모태펀드에 출연하고 있다. 나랏돈을 자기 자금처럼 쓰는 이런 투자 방식은 업계에서 ‘레버리지(지렛대) 투자’로 불린다. 금융 용어로 레버리지 투자란 ‘빚을 이용한 투자’를 뜻하지만 영화계에서는 정부 출자금을 지렛대 삼아 자기 수익률을 높이는 편법적 방식으로 통했다.

쇼박스의 경우 이렇게 타낸 돈으로 영화 '미스터고'에 25억원을 투자했다가 결국 투자조합에 손실을 입힌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들의 레버리지 투자는 2000년 이후 만성적으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청은 2013년 부당 투자 사실을 적발하고도 해당 펀드의 운영비용 삭감 조치 등만 내리고 법적 책임을 묻지 않았다. 대신 산하 공공기관으로 모태펀드를 관리하는 한국벤처투자가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자산총액 10조원 이상), 즉 대기업이 배급하는 영화에는 투자할 수 없도록 관련 규정을 바꿨다. 정부 예산이 투입된 펀드가 손실을 입은 만큼 소송에 나설 것이란 관측도 있었지만 사실상 잘못을 덮고 넘어갔다는 지적이 나왔다.

대기업 배급사들은 자기 투자 금액의 2배까지 끌어올 수 있는 레버리지 투자를 통해 흥행에 실패할 것으로 예상되는 영화에는 정부 투자, 즉 모태펀드 비율을 높이고 성공할 것 같은 영화에는 자기 투자 비율을 높이는 식으로 수익률을 관리했다고 한다. 업계에 따르면 투자조합 자체적으로 투자 여부를 판단한 펀드의 평균 수익률(2001~2004년 13개 작품 기준)은 17.3%를 나타낸 반면 대기업들의 레버리지 투자가 적용된 펀드(2006년 기준)의 평균 수익률(13개 작품)은 -19.7%를 기록했다.

막대한 제작비를 들이고도 흥행에 실패한 '미스터고'(관객 132만명)를 비롯해 쇼박스가 배급한 '폭력써클'(2만9000명), '원탁의 천사'(40만명), '뚝방전설'(33만명), CJ가 배급한 '마이웨이'(214만명) 등이 이런 투자가 적용된 대표적 사례로 영화계는 꼽는다. 다만 쇼박스 측은 "'미스터고'는 흥행할 것이라 생각해 전사적 역량을 집중한 영화로, 흥행 실패가 예상되는 영화를 골랐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벤처투자는 올해부터 다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이 배급하는 영화에 정부 예산을 투자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 모태펀드 2019년 1차 정시 출자사업 계획 공고'에는 지난해까지 존재했던 '대기업이 배급하는 한국 영화 프로젝트 투자금지' 조항이 삭제돼 있다. 지난해 한국 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투자금이 필요한 대기업 배급사들의 요구가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계에서는 과거와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기업 영화로 정부 지원 쏠림 현상이 강화되면 중소 영화배급사가 설 자리는 더 좁아질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박양우 문체부 장관에 이어 주형철 한국벤처투자 대표도 지난달 18일 청와대 경제보좌관으로 발탁됐다.

한국영화반독과점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는 "정부가 기대와 달리 영화산업 전체를 대기업에 갖다 바치기로 한 것 같다"며 "모태펀드가 대기업 배급사에 불법 전용되는 것을 막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심우삼 신재희 기자 s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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