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효숙 (4) 로마에서 2주만에 사표… 내친김에 미국으로

현지연수 마치고 귀국 안해,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 신세에 좌절… 한국 대사 도움으로 미국 비자 받아

강효숙 이사가 30대 때 이탈리아 로마를 방문해 한 성당에서 찍은 사진. 아쉽게도 첫 로마 방문 때 찍은 사진은 없다.

스물세 살, 평생 처음 타보는 비행기였다. 더구나 로마로 향하는 국제선을 타고 탈출에 성공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의 벅찬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쿵쿵거린다.

그러나 동트기 전 새벽에 도착한 피우미치노 공항은 어둡고 서늘했다. 노숙자들이 곳곳에 누워서 여행객을 보며 떠드는 모습에 부풀었던 마음은 두려움과 공포로 쪼그라들었다. 생전 처음 발 들인 타지는 외롭고 낯설고 두려운 현실이었다.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중 나온 동남아시아 담당 직원의 안내로 연수가 시작됐다.

신기하게도 아침 빛이 로마에 가득하자 숙소와 직장이 있다는 안도감이 찾아오며 새벽의 공포는 말끔히 물러갔다. 헐리우드 배우 같은 선남선녀들이 오가고 수천년의 기억을 담고 있는 유적지며 아름다운 분수 등의 풍경에 금세 매료됐다. 숨 쉬는 것도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탈리아에서는 가난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탈리아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2주간 연수를 마치고 나는 서울로 사표를 보내 달라고 부탁한 뒤 인사를 하고 나왔다. “탈출 성공!”

숙소를 현지 유학 중인 지인의 동생집으로 옮겼다. 공동부엌을 쓰는 셰어하우스 타입의 단칸방 아파트였다. 취직해서 이곳에 머물려면 말을 배워야 했다. 페루자에 국제학교가 있다고 해서 기차를 타고 물어물어 찾아갔다. 하지만 학교에선 넉 달 후에나 학생을 모집한다고 했다.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넌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거니. 돌아갈 곳도 없는데 무슨 일을 이렇게 경솔하게 하니.’ 나는 우주에 덩그맣게 남겨진 외톨이였다. 돌아오니 지인의 아파트 벽에 걸린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를 드러내고 포즈를 취한 모습이었다.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번다는 그녀의 말에 “아, 이곳은 내가 살 곳이 아니구나” 결론 내렸다.

사촌들이 사는 미국행을 결심했다. 당시 미국 비자 받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아무런 근거 없이 미국 비자를 받을 수는 없었다. 머리를 굴리다 한국대사관에서 추천서를 받으면 1%라도 가능성이 생기리란 생각에 대사관을 찾아갔다. 영사에게 “나는 알리탈리아 직원인데 미국 구경하고 서울로 돌아가려 한다”며 추천서를 써 달라고 청했다. 영사는 미국 비자는 본국에서 받아야 한다며 안 된다고 했다. 거절당하고 돌아왔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실랑이를 하는데 대사가 나오더니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나를 보던 대사는 “학교는 어디를 나왔는고” 하고 물었다. 이화여고라고 밝히자 그는 “내 조카도 이화여고 나왔는데”라고 했다. 그 순간 1%의 가능성이 50%의 소망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름이 뭐예요?” 누구라는 말에 나는 “아, 저 그 애 알아요”라고 말했다. 갑자기 대화에 여유가 생겼다. 그분은 부디 비자 받는 데 도움 되길 바란다며 추천서를 써줬다.

추천서를 들고 주이탈리아 미국 대사관에 가서 비자 신청을 하고 기다렸다. 한참 뒤 머리가 곱슬곱슬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흑인 영사가 들어오라고 했다. 그 역시 비자는 본국에서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말했다. ‘에라 모르겠다, 애당초 불가능한 것을 시작했으니 안 되면 그만이다’는 심정으로 더듬더듬 내 이야기를 하고 나왔다. 기다리는 동안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비자를 거부당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효숙 캉! 비자 스탬프가 찍힌 여권을 돌려받았을 때의 어리둥절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정리=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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