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에서 통용되는 유로화의 최고액권은 500유로다. 미국은 100달러, 중국은 100위안, 일본은 1만엔이 최고액권이다. 이들 화폐를 우리나라 최고액권 5만원권과 명목 금액을 단순 비교(외국 화폐를 1로 했을 경우)하면 유로화 1대 100, 달러·위안화 각 1대 500, 엔화 1대 5다. 우리나라 최고액권이 이들 나라에 비해 적게는 5배, 많게는 500배 고액권이다.

그러나 실질적 가치는 우리나라 5만원권이 500유로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17일 기준 500유로는 약 64만2000원이다. 그리고 100달러 11만3000원, 1만엔 10만원, 100위안 1만7000원가량이다. 일본을 제외한 주요국 화폐의 최고액권 단위가 기껏해야 세 자릿수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다섯 자릿수나 되는데도 구매력은 훨씬 못 미친다. 물건 값 계산할 때 유럽이나 미국, 중국인들이 세 자리 산수를 한다면 우리나라 사람은 다섯 자리 수학을 하는 셈이다.

화폐 단위가 커지면 계산과 거래, 표기, 회계 처리 등에 불편이 많다. 우리나라 총 국부와 누적 주식 거래량은 조 단위로는 어림없고 조의 1만 배인 경(京)으로 표시해야 한다. 1뒤에 동그라미가 16개나 붙는 어마어마한 수다. 이런 불편을 없애기 위한 정책 수단의 하나가 화폐단위변경(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총 두 차례 화폐단위를 변경했다. 이승만 정권 때인 1953년 2월 100원을 1환으로, 박정희 정권 때인 1962년 6월 10환을 1원으로 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근래 들어서는 2003년 1월 박승 당시 한국은행 총재가 노무현정부 인수위원회에 1000원을 1환으로 바꾸는 ‘화폐제도 선진화 방안’을 보고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달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국회에서 “리디노미네이션 논의를 할 때가 됐다”고 밝히면서 다시 공론의 장에 올랐다. 리디노미네이션을 할 경우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 등의 긍정적 효과가 있는 반면 인플레이션 유발과 화폐 변경에 따른 사회·경제적 비용 등 부정적 효과도 만만찮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선 이미 리디노미네이션이 시행 중이다. 커피값을 ‘3500원’ ‘4500원’이 아닌 ‘3.5’ ‘4.5’로 표기한 커피숍이 의외로 많다. 100원 이하 동전은 길에 떨어져도 거들떠보지 않는 세상이니 1000원이 사실상 1원 구실밖에 못 한다는 뜻일 게다.

이흥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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