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고3 수험생인 조카와 나눈 이야기다. 교회를 다니지 않던 아이였는데 고시원 근처 교회에서 받은 혜택에 감사하며 중고등부 예배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런데 설교 시간에 교회의 하나 됨과 연합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을 듣다가 한 개인의 중요성이 간과됐다고 느낀 조카는 문득 손을 들어 “질문 있습니다” 하고 외쳤다. 그런데 문제는 질문도 해보기 전에 제지를 당하고 “예배시간에 그러면 안 된다”는 주의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중고등부 사역자로 매 주일 설교를 하던 나로서는 그 아이의 당돌함이 신선했고 질문 내용이 궁금했다. 그는 영화 ‘파워 오브 원’을 예로 들면서, 전체 연합의 힘이 진짜 힘을 발휘하려면 먼저 개인 하나하나가 제힘을 발휘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고 한다. 종종 한 개인의 존재감을 소홀히 여기는 전체주의 구조 속에서 의미 있는 궁금증이라 생각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며 설교 중에 질문이 자유롭게 오가는 주일예배 장면을 그려봤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질문과 질문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 질문과 질문들 사이에서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하나님 나라의 계시들이 빛나는 선물로 쏟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많은 질문이 정답과 오답을 구별 짓기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와 같은 존재론적이면서 근원적인 것들이다. 이 대담한 물음들 덕분에 어쩌면 우리는 오늘 하나님에 대한 여러 물음과 함께 나에 대한 정직한 물음도 믿음의 여정 안에서 계속 확인해가고 있다.

질문은 말 그대로 바탕에 대한 물음이다. 내가 어디서 왔으며 지금 여기에 왜 있는지, 그리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그 바탕을 더듬더듬 짚어가면서라도 알고 싶어 질문한다. 그래서 질문은 그 자체로 두근거림이다. 문 열림에 대한 설렘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기대하는 응답이 아닐지라도 질문이 있는 동안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대상이 있는 한, 질문하는 가슴은 두근거린다.

다메섹 길 위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은 이 두근거림으로 “주님, 누구시니이까”(행 22:8) 물었고 주님이 누구신지 응답을 들었다. 그리고 이어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행 22:10)라고 질문했다. 주님이 누구신지 알았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물음이 생긴 것이다.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들 역시 이 두근거림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교회에서 중고등부 사역을 할 때 수련회 프로그램 중 ‘패널 디스커션(panel discussion)’ 시간을 몇 번 열었다. 청소년들이 궁금해하고 알고 싶은 모든 질문을 모아 정리한 후에, 같이 토론하면서 나와 교사들이 전문 토론자가 돼 그 질문들에 응하는 시간이었다. 일방적인 설교나 강의보다 참여자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누구보다 토론자들의 배움이 더해지는 시간이 됐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요즘 우리 교회들이 물음 없는 장소, 쌍방향의 대화가 불가능한 자리, 정해진 답을 들이밀며 ‘제발 좀 알아먹어라’는 듯 지배자의 자세로 물음표를 지닌 자들을 억압하고 있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우리가 반드시 전해야 할 메시지가 그것을 들어야 할 사람의 귀에까지 닿기에는 너무 멀고 지루할 수밖에 없다.

“질문 있습니다.” 물음표를 품고 성경을 읽는 것은, 이 성경을 주신 하나님께 끊임없는 말 걸기를 시도하는 것과 같다. 진리를 찾는 정직한 물음들에 성경은 그 문을 열어 진리를 보여주고 사랑을 경험하게 해준다. 주변 많은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을 찾고 싶어 한다. 길을 찾고 사람을 찾는 이들에게는 당연히 수많은 질문이 있다. 때로 그 속엔 말 같지도 않은 말, 기독교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질문도 있다. 그럼에도 언제든, 어느 곳에서든, 누구든, 무슨 질문이든 던질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지면 좋겠다. 비록 당돌하고 불안해 보일지라도 그런 물음표를 사랑하는 공동체에 “아! 그렇구나”하는 느낌표의 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김주련 대표(성서유니온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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