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연구원 개원 28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한국 정부가 미국의 속도조절 요구에 구애받지 말고 주도적으로 남북 협력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졌다. 또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를 북한 핵 폐기에 국한하지 말고 남한과 주한미군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주한미군 철수, 미국의 핵우산 제거 등 북한이 주장해온 ‘한반도 비핵지대화’와 같은 맥락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문장렬 국방대 교수는 17일 서울 중구 호텔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4·27 판문점선언 1주년 평가에 대한 질문에 “한국 정부가 결단 비슷한 것을 내릴 때가 가까워졌다. 언제까지 미국의 비핵화 요구에 보조를 맞춰 남북 관계를 종속시킬 것이냐”며 “우리 문제를 우리가 당사자로서 해나가는, 리스크를 부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문 교수는 “한반도 비핵화 논의가 북한 핵을 어떻게 제거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남한과 주한미군도 연결돼 있다”며 “이런 여건이 같이 충족되도록 추진돼야 한다”고도 말했다.

사회를 맡은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최근 ‘오지랖’ 발언에 대해 “민족 이익을 위한 당사자가 되라는 이야기”라며 “미국에 너무 구애받지 말고 판문점선언, 평양선언 이행하고 개성공단과 금강산을 열라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대통령은 굴뚝같이 하고 싶지만 정부가 처한 현실이 있기 때문에 고민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미국의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 요구는 북한을 무장해제시키고 패전국 취급하는 것”이라며 “중거리 탄도탄까지 다 없애라는 건 무리한 요구”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북한이 한국 정부에 두 번 속았다고도 했다. 그는 “북한은 ‘종전선언 하자’는 한국 정부 말에 속아서 동창리를 내줬고, 9·19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선 영변과 제재를 바꾸는 돌파구를 내놨는데 (하노이 회담이 결렬돼) 또 속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횡포를 부리는 건 미국인데, 정부가 미국에 편승해 조금의 여지를 가져가는 것으로 북한을 설득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한국 정부가 트릴레마(세 가지 딜레마) 상황에 놓여 있다고 분석했다. 한반도 비핵화, 한반도 평화체제, 한·미동맹이라는 세 가지 목표 간 상충 관계가 있어 이를 동시에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 교수는 세 가지 중 하나를 자르라면 무엇을 고르겠느냐는 질문에 반농담식으로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면 비핵화”라고 답했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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