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효숙 (7)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삶 깨달아

집·돈·아들에 대한 미련보다 나에게 주어진 오늘의 시간을 되도록 즐겁게 살려고 노력해

미국 뉴저지의 아파트에서 큰 딸 수현이와 함께 직은 사진이다. 사업과 육아로 바쁜 와중에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던 시절이다.

아이들이 태어난 뒤 보금자리를 뉴욕 맨해튼의 스튜디오에서 뉴저지의 정원이 있는 2층짜리 나지막한 렌트 아파트로 옮겼다. 미국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나 문화에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봄날 저녁 건너편에 살고 있는 부부와의 대화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그들은 아이가 곧 1살이 된다며 집을 고치고 있었다. 나는 내 집도 아닌, 빌린 집을 수리하는 건 낭비라고 생각했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 그들에게 물었다. “렌트한 집을 왜 고쳐?” 내 말을 들은 그들은 나보다 더 놀라서 내게 반문했다. “왜 이 집이 내 집이 아니야? 한 달을 살아도 그 동안은 내 집인데, 어떻게 그대로 살아? 너희는 취향대로 고쳐서 살지 않아?” 그리고 한 달 뒤 집수리를 마친 그의 딸 생일잔치에 갔다. 얼마나 아담하고 이쁘게 바뀌었던지, 연신 감탄을 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깨달음이 내 삶에 깊숙한 영향을 주었다. 그때 나는 집 돈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내게 없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오늘’을 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세상의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삶을 깨닫게 한 것이다.

이는 내가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결단을 할 수 있도록 해줬다. 그때는 몰랐지만 훗날 하나님을 믿게 된 뒤에 “모든 일이 네 손에 달린 것처럼 최선을 다하고 모든 일이 하나님 손에 있는 것처럼 기도하라”는 기독교 신앙과 통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는 말씀은 그래서 내게 유독 큰 힘이 됐다. 둘째딸 수진이의 사고 이후 줄곧 나아질 것이라 희망하면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의 시간을 되도록 즐겁게 살자고 마음먹게 해 줬다.

남편의 원단사업을 돕기 위해 나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미국 섬유시장에 수입된 원단의 90% 이상이 일본 원단이었다. 그 시장에 한국 원단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80년대 말 한국 섬유가 급성장하며 우수성이 인정받고 우리 회사도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디자이너들에게 그들의 디자인에 어울릴 만한 원단을 소개하면 그 원단이 유행의 주축이 됐다. 그때 매출이 증가하기 시작해 직원 20명을 채용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뉴욕이 패션 광고 증권의 성지라 불리던 시절, 패션업계에선 물 밑에서 쉴 새 없이 노를 젓는 수고가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름다움의 절대치를 뽑아내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던지. 이런 노고를 거쳐 나온 작품들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42번가에 있는 뉴욕 도서관 등에서 패션쇼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최고의 장소에서 한땀 한땀 빚은 최고의 작품들이 보여질 때의 감동은 쉽게 누를 수 없었다.

아이들도 건강히 잘 자라고, 사업도 재미있게 성장하며 경제적 안정을 누리는 사이 여기저기서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며 학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학교 행사가 많아졌다. 남편은 바이어를 만나야 한다거나 출장을 가여 한다며 참석하지 않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뭔가 맘이 편치 않은 듯 말수가 적어졌다. 함께 살던 시어머니와 친정 엄마의 골도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정리=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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