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와 신해철.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사는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영원히 비켜갈 수 없다. 한 사람은 마이너리티 중의 마이너리티인 헤비메탈 출신이지만 90년대의 개막과 함께 3인조 보이그룹으로 변신해 주류의 모든 영광을 지배했다. 또 한 사람은 대학가요제 그랑프리라는 레드 카펫을 밟고 등장해 성공적으로 솔로로 데뷔했다. 그리고 록밴드의 수장으로 변신해 한국 대중음악의 문제의식 수준을 한껏 드높였다.

신해철은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그대에게’로 대상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철학적인 메시지가 담긴 곡들을 발표하며 90년대에 큰 사랑을 받았고, 2014년 의료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많은 팬들에게 슬픔을 안겼다. 뉴시스

90년대 아이콘이 선택한 머나먼 후퇴

서태지가 존재하는 한 신해철은 영원한 2인자였다. 하지만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을 수놓은 이 두 음악 감독은 시장에서의 영향력의 차이와 상관없이 언제나 팽팽한 평행선을 그렸다. 신해철이 스스로 밝힌 대로 ‘고뇌하는 비겁자’로서 엘리트적 카리스마를 뿜어냈다면, 서태지는 ‘거침없는 낙오자’로서의 영웅적인 카리스마로 90년대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둘 다 댄싱그룹과 밴드를 해체시키고 솔로가 돼 공교롭게도 같은 시즌에 컴백한다.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은둔의 생활을 택한 서태지가 메탈 사운드에 기반을 둔 얼터너티브 록 뮤지션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공고화했다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신해철은 팝 사운드의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전방위적으로 실험하기로 마음먹었다. 낙오자는 은둔자로, 비겁자는 순례자로 변신한 셈이랄까.

이들이 자리를 비운 세기말의 대한민국은 혼란 그 자체였다. 군부 정권을 타도하고 일궈낸 민주주의의 수립과, 분배와 정의의 실현이라는 소박한 꿈은 외환위기라는 글로벌 자본의 일격 앞에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93년 집권한 김영삼정부는 정권 말기의 도덕적 해이 속에 벌어진 외환위기로 인해 하나회 숙청과 금융실명제 같은 성과마저도 온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망국의 주범이 됐다. 정권에 몸담은 많은 사람이 감옥으로 가는 포토라인에 섰다.

살인적인 구조조정이 경제 전반에 걸쳐 강요됐다. ‘평생직장’의 신화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졌다. 거죽은 달콤하지만 속내는 무시무시한 수사학인 ‘노동 시장의 유연화’는 노조의 반대를 간단히 제압하고 마침내 실현됐다. 치솟는 환율과 이에 비례해 상승한 실업률은 한국사회를 양극화의 벼랑으로 내몰았다. 이제 대학은 더 이상 자유와 민주의 수호자가 아니며 진보 혹은 혁명의 참호도 아니었다. 각 대학의 학생회장 선거에서는 몇 년 전만 해도 출마조차 언감생심이던 비운동권 출신 후보가 학생회의 수장이 되곤 했다. 대학은 구직을 탐하는 직업 훈련소 혹은 취업 학원으로 전락했다.

밴드 넥스트 시절, 신해철은 권력의 상징인 제복을 역설적으로 선호했다. 콘서트나 앨범의 재킷에는 전체주의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유니폼이 꼭 동반됐다. 개인의 자발적인 사유를 억압하는 모든 권력 장치에 대해 비타협적인 혐오로 일관해 온 그의 철학을 상기한다면 일견 모순적이지만, 그는 바로 그 모순의 동력을 밴드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았다.

97년이 저물 즈음, 밴드의 중압감에 지친 그는 밴드 해산을 발표했고 홀로 영국으로 떠났다. 넥스트 나머지 세 멤버들과 이들의 열광적인 팬들에게는 한마디로 경악에 가까운 일이었다. 신해철은 절정인 커리어에서 왕관을 스스로 반납하고 음악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머나먼 후퇴를 결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듬해, 세기가 저무는 98년에 그가 보내온 엽서는 ‘테크노 웍스(Techno Works)’라는 제목이 붙은, 무려 두 장의 CD가 담긴 솔로 신작이었다. 그에게 테크노는 낯선 무기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의 초기 솔로 시절에서, 그리고 넥스트 활동 중에도 영화 ‘정글스토리’ OST나 윤상과의 프로젝트 앨범 ‘노땐스’에서 일렉트로닉 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을 지켜본 바 있다.

그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영국 런던의 스튜디오에서 팀플레이가 기본인 록 밴드 음악의 대안으로서의 테크노, 개인주의적 상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이 테크놀로지 음악의 본령에 도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앨범의 제목이 암시하듯 이 앨범은 습작 메모의 성격이 강하다. 두 장의 볼륨 또한 구심력 없는 과잉의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아마도 이 앨범은 그의 솔로와 밴드의 이력을 통틀어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음반이 아닐까.

신해철의 명곡 ‘일상으로의 초대’가 담긴 98년 앨범 재킷.

90년대 최고의 사랑 노래

그는 테크노가 이 땅의 대중에게 느닷없이 생소한 경험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치 않았다. 이 주도면밀함이 (그의 적대자들에겐 참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첫 번째 CD의 리메이크 기획을 이끌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월광’이나 ‘재즈카페’의 새로운 버전은 그가 그저 옛날의 영광을 되새김하려는 추악한 의도가 아니었음을 조용히 증명한다. 그는 필 니콜라스의 트럼펫 솔로와 남궁연의 피아노 지원을 받으며 다양하게 고안된 자신의 보컬 튜닝으로 기존 두 개의 ‘재즈카페’ 버전에 무궁동(無窮動)의 새로운 해석을 추가했다.

하지만 달랑 두 곡의 신곡만을 담은 두 번째 CD가 이 앨범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했다. 그러나 비난을 쏟아내는 사람들도 무려 세 버전으로 나누어져 있는, ‘일상으로의 초대’라는 걸작을 마주하면 쓰게 입맛만 다신 뒤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앨범이 아니라 싱글로만 따진다면 나는 단연코 이 노래를 그의 장대한 디스코그래피에서 가장 뛰어난 싱글로 뽑고 싶다. 더 나아간다면, 당연한 논란이 일겠지만, 나는 이 노래를 90년대 가장 높은 봉우리를 차지한 ‘(남녀 간의) 사랑 노래’로 선출하고 싶다. 역사가 일천한 대중음악이 짧은 시간 안에 강력한 사회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은 이 예술이 20세기 (젊은이들의) 사랑의 열정과 그 상실의 에너지를 주도적으로 담아왔기 때문이다.

30년대 이후 사랑의 찬가는 자본주의의 예술 공장에서 끝없이 재생산됐다. 그것은 대중문화 시장을 젊은이들이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10대와 20대는 끊임없이 새로운 유행의 ‘사랑 상품’을 갈구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 일회성 소비재로 전락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양은 질을 지배한다. 대중음악의 숱한 명곡을 차지하고 있는 것 또한 사랑의 노래임을 부인할 수 없다. 고복수의 ‘짝사랑’이나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부터,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와 패티김의 ‘이별’을 거쳐,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비련’에서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에 이르는 동안 한국 대중음악은 비약적인 풍요를 분만했다.

사진=뉴시스

신해철은 이 전통의 연장선 위에서, 사랑 노래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던 과잉의 감정이입을 차가운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자제하면서, 사랑의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풍경을 담담히 형상화한다. 격렬한 선동문을 쓰는 데 익숙했던 그가 따뜻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고도로 정제된 수필을 쓴다. 하지만 느릿하게 시작된 프레이즈는 반복되면서 조심스럽게 고조되고 에너지가 충일되는 순간 하이라이트의 절정이 보컬의 오버 더빙을 통해 환상처럼 펼쳐진다. 본인 스스로도 장난스럽게 인정한 적이 많듯이 보컬리스트로서 신해철은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이 지적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생래적으로 타고난 중저음의 톤은 이 노래에서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그리고 그가 헤비메탈 키드 시절부터 임재범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후천적으로 습득한 샤우트 창법 또한 무거운 메탈 넘버에서는 조금 부족했을지 몰라도 이 곡에서는 안성맞춤이라는 느낌이 들 만큼 정교하게 들린다.

고독하게 이 노래를 멀리 런던에서 녹음하던 신해철은 당시 서른의 고개를 막 넘는 중이었다. 이 노래는 신해철에게 일종의 ‘서른 즈음에’에 해당한다. 이미 8장의 정규 앨범과 셀 수도 없는 비정규 앨범을 낸 베테랑에게 그 흔한 사랑 노래가 없었을까 싶지만 놀랍게도 신해철의 20대엔 그 자신의 손으로 쓴 사랑 노래가 거의 없었다. 솔로 데뷔 앨범의 머릿곡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는 무명 시절 동료의 곡이며 그의 대학가요제 데뷔곡 ‘그대에게’는 사랑 노래라기보단 음악에 대한 헌신이 주제였다. 굳이 찾는다면 넥스트 시절 싱글로 된 메탈 발라드 ‘히어, 아이 스탠드 포 유(Here, I Stand for You)’가 있겠지만 이 노래를 걸작으로 꼽기에는 많은 감정적인 저항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해철이 서른의 나이에 이르러 사랑 노래를 하나 제대로 토해냈다는 것이 나는 이 노래의 진정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는 시장의 기본적인 요구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진취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노래는 그의 긴 디스코그래피의 정점이면서 동시에 한국 대중음악이 상실의 시대에 낳은 최고 걸작이기도 하다.

<강헌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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