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를 출입할 때 친하게 지내던 외교관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을 같이 먹으며 한참 한담(閑談)에 빠졌다. ‘외교란 무엇인가’를 놓고 이런 저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느닷없이 그가 체코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삶은 다른 곳에’를 읽어봤느냐고 물었다. ‘그는 언제나 삶을 찾았지만, 삶은 언제나 그와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북미국 간부였던 이 외교관 입에서 나온 소설의 한 대목이었다. “큰일을 맡으면 늘 이 말을 생각하죠.” 그는 그렇게 말했다. 이상에 빠진 청년과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등장한 공산 체코의 현실, 이상과 동떨어진 괴물 같은 사회…. 소설의 줄거리를 더듬어봤다.

“우리 일이 대단히 큰 이념을 추구하는 게 아니란 뜻이에요. 명분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공무원 돼서 일하다 보니 절감하게 된 겁니다.”

문재인정부는 지난 2년 동안 외교적으로 꽤 큰 그림을 그려왔다. 북핵을 놓고 미국과 북한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다. 문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가장 정상회담을 많이 한 국가의 정상이 되기도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하기도 한다. 발자취는 뚜렷한데 결과는 아직 좋지 않다. 다 해결될 듯하던 북·미 간 핵협상은 되레 판이 깨진 것처럼 보이고, 북·미는 이전 시대처럼 서로 도사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미국으로부터는 “지나치게 북한 편을 드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고, 북한에게선 “남한은 중재자가 아니라 당사자”란 면박을 당한다.

북한은 미국과 협상을 하면서도 전통적인 중·러 관계를 버리지 않고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가 지나치다 싶으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러를 끌어들여 자신들의 입지를 더 지지하도록 만든다. 그렇다고 미국이 한국을 북핵 당사자로 여기지도 않는다. 언제나 북한의 핵무기를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대량살상무기로 여기지, 한국의 안위를 충분히 고려해주지 않는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지난 22일 우리 기자들을 만나 문재인정부의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평가에 대해 “뭔지 모르겠다”고 한 대목이 이를 잘 보여준다. 청와대가 지난 북·미 핵협상을 “굿 이너프 딜(good enough deal·충분히 유의미한 협상)”이라고 한 것을 정면 반박한 셈이다.

지금 한국은 외교적으로 어디에도 기댈 곳이 마땅치 않은 형국이다. 북한을 주적(主敵)으로 놓고 전통적인 한·미동맹을 형성하기엔 ‘김정은 북한’에 너무 깊숙이 발을 담근 상태고, 그렇다고 북한 편을 대놓고 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직 북한은 국제적으로 유엔 안보리의 경제제재를 받는 ‘불량국가’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북·중·러에 맞서 우리 입장을 지지했던 일본과도 매우 소원해진 상태다.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불협화음이 한·미·일 군사동맹에까지 번져 일본과의 파열음을 내고 있어서다.

냉전체제가 해체된 이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남북이 정치적·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을 미·중·러·일 등 주변국은 철저할 정도로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활용했다. 이합집산하면서도 단순도식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 북·중·러 대 한·미·일. 그간의 외교가 이 단순도식을 바꿔놨는지 되돌아볼 때가 된 것처럼 보인다.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 미국과 마주 앉게 했지만, 북·미는 쉽게 화해하지 못한다. 중·러도 정치적·외교적으론 북한과 훨씬 밀착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말처럼 “한반도에서 전쟁은 공멸”이지만, 평화를 위해 무조건 비둘기의 모습만 보여선 안 된다.

외교는 상반된 이익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생존을 위해 선택하는 인간의 행위라 할 수 있다. 상대방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과 한계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이상보다는 현실을 추구해야 살아남을 수가 있다. 삶이 ‘다른 곳’이 아닌 ‘지금 이곳’에 있게 만드는 행위가 외교일지 모른다.

신창호 토요판팀장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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