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실천’ 충실했던 평신도들 최대 만세운동 일으키다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12) 강화 만세운동 주도한 교회들

인천 강화도에 있는 강화중앙교회에 지난 18일 110명의 학생이 모여들었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인 전인기독학교 청소년들이었다. 국토대장정의 하나로 천안 화성 강화 지역을 직접 걸으며 기독교 역사 유적지에 담긴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중이었다. 오랫동안 길을 걸은 탓인지 봄볕에 그을린 얼굴이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1910년대 강화읍교회 앞에서 찍은 교인 사진으로 이 교회에서는 조구원 조봉암 오영섭 등 엡웟청년들이 회합을 갖고 지하독립운동을 벌였다. 강화기독교역사연구소 제공

100년 전인 1919년 4월 이맘때도 일제로부터의 독립 염원을 품은 청년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당시 이 교회(당시 명칭은 강화읍교회) 소속 감리교인으로 매일신보 기자로도 활동했던 조구원과 조봉암 등 기독 청년들은 독립운동을 독려하는 벽보를 제작해 붙였다. 당시 그들의 얼굴도 일제의 탄압에 대한 울분과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발갛게 상기돼 있었을 것이다.

그해 3월 18일 강화도에서는 2만여명이 참여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단일시위로는 전국 최대 규모였다. 시작은 길상면 선두리교회(현 선두교회)에 다니던 황도문(당시 22세 연희전문대생) 학생으로부터였다. 그는 3월 5일 서울역에서 열린 학생대연합시위에 참여하면서 3·1운동을 접했다. 이튿날 강화로 내려온 그는 유봉진(당시 34세) 길직교회 권사를 만나 이 같은 소식을 전했다.

유 권사는 강화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한다. 그는 강화진위대 소속 군인 출신으로 1903년 일제에 의해 강화진위대가 강제 해산될 때까지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 중 한 명이었다. 1915년부터 이어져 오던 성령 운동, ‘마리산 부흥회’를 이끈 지도자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유 권사는 교회 담임 이진형 목사를 찾아가 허락을 받은 후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9일 주일예배 후 교회에는 유봉진 황유부 염성오 등 21명이 모였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강화읍 장날인 18일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기로 약속했다.

1949년 김구 선생(왼쪽 세 번째)이 강화를 방문했을 때 모습으로 김구 선생은 당시 강화읍교회와 합일학교 등을 방문했다. 강화기독교역사연구소 제공

이은용(64) 강화기독교역사연구소장은 24일 “당시는 3 1운동이 일어난 직후여서 일본 경찰과 헌병들의 감시가 한층 강화됐던 때”라면서 “강화도에서 시위를 차질 없이 준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강화읍내 중심지가 아닌 변두리 면 지역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바로 이런 점이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이 아니었을까 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말처럼 시위를 주도한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이는 당시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겨진 43명 중 예수교인으로 분류된 개신교인이 28명이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전체의 65%다. 천주교인도 3명 있었는데 당시 성공회교인들을 천주교인으로 분류했던 것을 고려하면 전체의 72%가 기독교인이었다.

이 소장도 강화도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특징 중 하나로 시위 준비와 추진이 감리교인들의 주도와 성공회 교인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점을 꼽았다. 만세시위가 평신도 위주로 이뤄졌다는 점도 특징이다.

이 소장은 “신행합일 정신,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행위가 일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천적인 믿음을 앞세운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강화중앙교회(옛 강화읍교회)에 설치돼있는 삼일독립만세운동기념비 모습. 임보혁 기자

서울에서 가져와 18일 거사 당일 배포될 예정이었던 ‘독립선언서’도 선두교회 본처전도사였던 황유부의 집에서 수백 장이 비밀리에 인쇄됐다. 이를 강화 전역에 배포하기로 한 염성오, 홀로 인쇄물을 강화읍으로 옮겨 나눠주는 임무를 맡았던 김유의(여)도 기독교인이었다.

‘강화중앙교회 100년사’를 쓴 이 소장은 김유의에 대해 “여성 단독으로 거사를 이룬 기독인의 담대함과 신앙 양심의 발로”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만세운동의 여파는 강화 지역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상당수 교인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해 일경에 체포되는 등 일본 당국의 감시와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성도들은 교회 출석을 회피했다. 당시 강화읍교회의 평균 출석 교인 수는 300여명에서 30여명으로 급감했다. 교회는 그래도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1920년 교회 내 청년운동 조직인 엡웟(Epworth)청년회가 1년 동안 자선 공연을 벌여 거둬들인 수익금 2300여원 중 1300원을 만세운동으로 수감 중인 가족의 구제금으로 기부했다.

‘강화중앙교회 100년사’는 당시 성도들의 이런 신앙심을 “일제의 압제하에 있는 나라의 상황이 애굽의 압제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고 봤기 때문”이라며 “애굽에서 탈출할 때 하나님께서 기사와 이적으로 구원하셨던 것처럼 강화의 교인들은 민족 해방의 소망을 교회를 통해 찾고자 했다”고 평가했다.

강화=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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