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당분간 도발 없는 대치 국면 이어갈 듯
관건은 북 경제 상황인데 최근 엘리트 중심 타격 징후 강해져
한국, 미국과 공조 강화하며 북한의 ‘비핵화 가격’ 낮춰야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끝난 지 2개월, 세부는 몰라도 윤곽은 드러났다. 최대 승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최대 패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패자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시작한 이래 제재가 먹혀든다는 걸 확인한 게 가장 큰 수확이다. 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지나칠 정도로 제재 해제에 집착했다.

스티브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김혁철 국무위 대미특별대표 간 실무회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 위원장은 협상의 기본 중 기본인 ‘비핵화 대상이 정확히 무엇이냐’는 질문에도 답하지 않은 채 제재 해제를 줄기차게 요구했다고 한다. 제재가 북한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확인한 트럼프 대통령은 어설프게 ‘봉합’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김 위원장의 최대 오판은 트럼프 대통령을 얕보았다는 것이다. 북한 측은 실무회담의 진전과 상관없이(아니 실무회담의 진전을 일부러 피하면서) 트럼프만 ‘톱다운’ 방식으로 설득하면 된다고 여겼다. 트럼프가 재선을 앞두고 ‘북한 문제 해결’이라는 외교 치적에 목맬 것이며, 판을 깨지 않으리라고 예단했다.

이에 반해 백악관은 이미 실무회담 과정에서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의심이 컸다. 트럼프 대통령은 빅딜, 스몰딜, 노딜 등의 다양한 카드를 들고 회담장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문 대통령도 패자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신뢰를 잃었다.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에는 진정성이 있다”는 ‘보증’이 부메랑이 돼 돌아오고 있다. 특히 하노이 회담 결렬의 충격을 회복하기 위해 서두르다 스텝이 더욱 꼬였다. 미국 측이 ‘제재 해제 불가’를 못 박은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를 추진하겠다고 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

한국이 미국 편인지, 북한 편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워싱턴에서 증폭됐다. 청와대가 양측을 중재한다며 내세운 ‘굿 이너프 딜’(충분히 좋은 거래)과 ‘조기 수확(early harvest)’도 북한이 원하는 단계적 이행에 방점이 찍히면서 미국의 부정적 인식을 강화시켰다.

비핵화 로드맵에 대한 이러한 이견이 제대로 조율되지 않은 채 열린 한·미 정상회담은 빈손으로 끝났다.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과 마주 앉은 채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를 공박하고, 정상 간 단독 대화 시간이 사실상 없는 황당한 회담이 됐다. 한국이 미국을 설득하지 못하는 걸 확인한 북한은 표변했다. 남한 당국이 오지랖 넓게 촉진자, 중재자 역할 하지 말고 같은 민족인 북한 편을 들라고 했다. 한반도 비핵화 평화 프로세스에 사실상 모든 정치적 자산을 건 문재인정부로서는 충격적인 반전이다.

하노이 회담 이후 북한은 ‘버티기’를, 미국은 최대 압박을 선택했다. 다시 시작된 북·미 간 밀당(밀고 당기기)이 어떻게 끝날지는 북한 경제 상황에 달렸다. 제재로 북한 경제 타격이 심하면 김 위원장은 ‘비핵화 가격’을 낮추고 협상 테이블에 앉을 확률이 높아진다.

손꼽히는 북한 경제 전문가인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에 따르면 경제 제재로 인한 대외무역 급감의 파장이 장마당 등 시장으로 전이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급여와 배급을 받는 북한 엘리트층부터 타격을 받기 시작했고 마지막 단계에는 석유, 쌀 등 필수품 가격 불안이 현실화할 것”이라며 “북한이 내년 말에는 달러 부족으로 외화난에 빠질 수 있다”고 했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도 “제재로 북한 경제의 흐름이 나빠지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시간은 미국 편”이라고 했다.

경제가 어느 정도 나빠져야 김 위원장이 행동을 바꿀지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북한이 경제 제재의 영향권에 들어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 위원장이 최근 시정연설에서 자력갱생과 사회 통제를 강조하고 서둘러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난 것은 위기감의 반영이다.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 고강도 도발로 복귀하기도 어렵다. 그 경우 트럼프가 실제로 북한을 무력으로 공격할 수 있음을 김 위원장은 알고 있다. 중국도 추가 도발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센터장이 말한 ‘도발 없는 대치 국면’이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문 대통령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미국의 신뢰를 상당부분 잃었다는 게 가장 큰 타격이다. 철저한 외교적 고립에 빠졌던 북한을 도와줬더니 도리어 적반하장 식으로 나오는 것도 뼈아프다.

한·미 간 신뢰가 깊고 공조가 긴밀히 이뤄져야 중재자든 촉진자든 힘을 받는 걸 북한의 표변이 증명했다. 그리고 주 플레이어들인 북·미가 관망세로 돌아선 지금 한국이 조급증을 낸다고 해결될 일은 없다. 대화 국면의 지속을 지원하면서 한·미 간 신뢰 회복에 주력하는 게 급선무일 것이다.

배병우 논설위원 bwb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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