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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흘러도 끝나지 않는 고통, 원폭 피해 알렸다가 이혼, 자녀 파혼…

원폭 피해 생존 2283명, 질환 대물림 불안감도


차무남(77)씨는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때 투하 지점에서 약 3㎞ 떨어진 곳에서 부모와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상처를 입고 평생 피부병으로 고생했지만 주위에 함부로 피폭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1960년대 말 아내와 결혼할 때 아버지는 “피폭자라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이 말을 지키다가 10여년 전 두 딸이 결혼하고 나서야 사실을 털어놨다. 아내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며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차씨는 “아직 사위들에게는 알리지 못했는데 집에 오는 피폭자 지원 관련 우편물을 보고 눈치는 챈 것 같다”고 말했다.

원폭 피해가 발생한 지 74년이 지났지만 국내 원폭 피해자들은 아직도 사회적 차별과 불안감에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가 25일 발표한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실태 조사’에는 피폭 사실을 밝혔다가 결혼이 무산되거나 이혼당했다는 피해자 사례가 많다. 이번 실태 조사는 2017년 7월 원폭피해자지원특별법 시행 이후 정부 차원에서 실시한 첫 조사다.

한 80대 남성 원폭 피해자는 심층면담에서 “아들이 결혼할 때 여자 집에서 내가 원폭 맞은 걸 알게 돼 파혼했다”고 말했다. 이후 아들이 다른 여자와 결혼했는데 이때는 자신이 피폭자란 걸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알려면 여자 집에서 알아내든가 해야지 내가 먼저 말하진 않는다”고 했다.

원폭 피해 2세에까지 차별은 이어졌다. 40대 남성은 “결혼할 때 부모님이 원폭 맞은 게 문제 될까봐 아내에게 말 안했고 아이들에게도 유전적 영향을 미칠까봐 알리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다”며 “지금은 아내가 어디 사는지 연락도 안 되고 자식들도 그 뒤로 본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2세는 피해 1세가 한국으로 돌아온 뒤 낳은 자식 세대다.

지난해 8월 기준 원폭 피해자로 대한적십자사에 등록된 생존자는 2283명이다. 이남재 합천평화의집 사무총장은 “자신이 피폭자란 사실을 숨기고 등록하지 않은 사람까지 하면 피해자는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원폭 피해자들은 또 피폭으로 인한 질환이 자식에게 대물림될까봐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피해 1세인 70대 여성은 “애들이 백일 됐을 때부터 발만 쳐다봤고 딸들도 자기네 애들 발에 염증 생길까봐 지금도 신경이 곤두서 있다”고 했다. 이 여성은 “딸들도 노이로제에 걸려서 자기네 애들이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발 괜찮냐’고 물어본다. 그게 인사다”라고 했다.

원폭 피해자가 겪는 정신적 고통은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원폭 피해자 건강실태 조사에서도 유의미하게 나타났다. 이에 따르면 피해자 1세에서 우울증이 가장 흔하게 발생했고 발병률은 일반인보다 93배 높았다. 피해자 2세도 우울증에 시달렸는데 2세 남성의 발병률은 일반 남성보다 65배, 2세 여성의 발병률은 일반 여성보다 71배 높았다. 다만 복지부는 이번 조사에서 우울증은 별도로 분석하지 않았다.

한편 복지부는 원폭 피해자의 건강보험진료비 청구자료를 분석한 결과 비슷한 연령대와 비교했을 때 암, 희귀난치성질환 등의 유병률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왔다고 밝혔다. 입원 이용률도 원폭 피해자의 경우 34.8%를 기록해 우리나라 70세 이상 평균 입원 이용률(31%)보다 높았다.

경제적 상황도 여의치 않았는데 원폭 피해자 1세 중 36%가 기초생활수급자였다. 65세 이상 전체 인구에서 기초생활수급자 비율이 5.7%인 점을 감안하면 경제적 하위층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셈이다. 2세의 월 평균 가구수입은 291만원으로 2017년 우리나라 전체 가구 월 평균 소득인 462만원에 훨씬 못 미쳤다.

원폭 피해자가 정부에서 받는 지원은 월 10만원의 진료 보조비가 전부다. 이것도 피해자 1세에 한한 것이지 2세는 실태조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피해자 2, 3세 지원을 위한 원폭피해자지원특별법 개정안은 국회에 계류돼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이제는 2세 등에 대해서도 국가가 실태를 파악하고 필요한 지원을 적극 검토할 때”라며 “피해자 지원을 강화하기 위한 관련 법률의 개정과 예산 확보를 추진할 예정”이라고 했다.

김영선 기자 ys8584@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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