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효숙 (12) 외로움 견디며 우울증으로 지쳐가는 작은 딸

잘 웃고 친구들 좋아하던 둘째 딸 수면 부족·대인 기피로 힘들어해 사표 내고 집에 돌아가자고 설득

둘째 딸 수진이(왼쪽 두 번째)는 2007년 미국 예일대를 졸업했다. 주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나와 큰딸 수현이뿐만 아니라 아이들 아빠도 자리를 함께했다.

수진이는 2008년 9월 HSBC의 글로벌 매니지먼트 연수를 위해 런던으로 떠났다. 1개월간 연수를 끝낸 뒤 친구들이 있는 상하이로 발령받기를 원했지만, 런던 본사에 남게 됐다. 가족들은 실력이 좋아 본사에 남은 게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한 보름쯤 지났을까. 녀석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잠이 안 와서 미칠 것 같아.” 그러고는 그냥 울었다. 퍼뜩 수진이가 혼자 있는 것을 유난히 힘들어 하던 초등학교 때 일이 생각났다. 2박 3일 마카오로 수학여행 가던 날, 엄마가 자원봉사부모가 돼 꼭 함께 가달라고 했다. 낮에 아이들 틈에선 쿨한 척하느라 엄마를 본 척도 하지 않다가도 밤이면 몰래 내 방에 와서 겨우 잠들던 아이였다. 물어보니 하루에 1~2시간밖에 못 잔다고 했다. 나도 불면증에 시달려 봤기에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바로 알았다. 그 길로 런던을 향해 떠났다.

수진이의 상태는 상상외로 피폐해져 있었다. 웃음 대신 우울함이 가득한 수진이의 얼굴은 많이 지치고 상해 있었다. 수진이는 오래된 건물과 골동품 가게가 많은 동네, 영화로도 유명한 노팅힐의 3층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대낮에도 침침한 복도는 스산했고 넓지만 휑한 방은 외로움을 느낄 만했다. 먹는 것, 특히 한국 음식을 좋아하던 아이가 매일 한 가게에서 겨우 2~3가지의 샌드위치만 사서 먹고 지내고 있었다. 회사에서 일할 때 외에는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듯했다. 파티 초청장들이 집에 이리저리 굴러다녔지만, 늘 혼자 지낸다고 했다. 친구들을 좋아하고 재미나게 놀던 녀석이었는데 대인기피증이라니…. 우울증도 깊어진 상태였다.

그때 내가 우울증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았더라면 수진이를 대하는 방법이 달랐을지 모른다. 스스로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자책하는 수진이에게 다르게 접근했을 텐데, 하는 후회가 짙다. 나는 용기를 주고 싶고 힘이 돼주고 싶어서 네게 주어진 환경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누구나 꿈꿔보지만 아무나 이룰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특히 이 모든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이렇게 우울해 해선 안 된다고 쉴 새 없이 충고했다.

수진이는 머리로는 알기에, 어마어마한 죄책감으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다고 호소했다. 사표를 내고 엄마가 있는 서울이든, 아빠와 언니가 있는 뉴욕이든 가자고 애원해도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다며 버텼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매일 똑같은 기도를 드리며 함께 있어 주는 것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 런던 전철역에서 본 수진이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한다.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인데 죽어있는 듯한 참담한 모습이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아이를 덮고 있었다. 나는 당장 일을 그만두자고 했다. 혼자 도저히 설득이 안 돼 뉴욕에 있던 수진이 아빠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혼했지만 아이들 아빠는 딸들이 있는 홍콩을 오가며 계속 만나고 있었다. 아빠와 언니 수현이까지 합세해 설득하면서 수진이는 2009년 여름 사직서를 내고 미국으로 갔다.

나는 수진이를 데리고 그 마음이 회복될 때까지 네팔이나 아프리카 선교지에 머물고 싶었다. 그러나 뉴욕으로 돌아간 수진이는 영국에서의 삶을 만회하고 싶었던지 세계적인 광고회사 오클리에 다시 입사했다. 자신의 마음을 보듬는 일보다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더 중요하고 두려웠던 것이다. 사람들 모두 저마다 삶이 있어 너에게 집중하지 않는다고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 이 아이를 이렇게 두고만 보시렵니까.

정리=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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