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효숙 (13) 화해가 시작될 즈음 맞이한 ‘영원한 이별’

아이들 아빠와 인연 놓지 않으려 노력… 사랑한단 말 못하고 떠나보내 후회

헤어진 뒤에도 일 년에 두 번 어색한 가족여행을 떠나곤 했다. 2008년 바하마 여행 당시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

수진이의 우울은 깊어져 갔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고 기도하는 일뿐이었다. 수진이는몸이 교회에 나와있어도 죽은 것처럼 앉아 있을 뿐, 나아지지를 않았다. 나의 기도도 달라졌다. 나는 2001년 홍콩에 부흥회 강사로 오셨던 최일도 목사님의 영성 수련을 통해 하나님께 내 깊은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기도를 배웠다. 이후 나의 기도는 나를 기다려주시고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곱게 서술한 기도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수진이를 보면서 “아버지, 어째서 당신 딸을 외면하시나요” “당신은 분명히 전능하신 하나님 맞나요” 하며 감히 하나님께 대들기 시작했다.

두 딸이 미국의 대학으로 공부하러 떠나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나는 홍콩에서 홀로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저녁에 퇴근해서 돌아와 캄캄한 집의 문을 열 때면 왜 그리 서럽던지…. 그때 가장 많이 생각나고 미안한 사람이 애들 아빠였다. 우리가 떠나온 뒤 혼자 어두운 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서러웠을까 생각했다. 이혼한 뒤에도 온 가족이 1년에 두 번은 함께 여행을 갔다. 내게는 참으로 어색한 여행이었지만 그도, 나도 서로 인연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당시 내 곁에서 나를 보호해주고 상처를 보듬어주며 청혼까지 한 친구가 있었다. 아이들이 우선이었기에 대학에 보낸 뒤 생각해보자고 미뤄왔지만, 곧 깨달았다. 그에게 고마운 마음은 컸지만, 그와 결혼할 수 없음을 알리고 서울행을 결심했다.

한국을 떠난 지 31년 만인 2006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놀라웠던 것은 싫다고 도망갔던 내가 타지에 살면서 뼛속까지 한국사람의 긍지를 갖고 귀국했다는 사실이었다. 일은 잠시 쉬기로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진행되는 다일공동체 영성 수련 안내를 기쁨으로 감당했다.

수진이의 우울증으로 애들 아빠와 연락하는 일이 늘었다. 2010년 1월 딸들과 함께 애들 아빠의 환갑잔치를 깜짝 파티로 열었다. 그 환갑잔치가 감동이었는지 애들 아빠는 아이들이 추천하는 영성 수련에 참석하기로 했다. 4박 5일 일정을 끝내고 우리는 서로 머리를 조아리고 “미안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를 되뇌며 눈물로 사죄했다. 그렇게 우리의 화해가 시작됐다. 하나님과의 화해도 시작돼 그는 주님을 영접했다. 할렐루야! 그는 영성 수련 일정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간 후에도 서너 번 서울로 찾아와 기독교 영성에 대해 배운 뒤 돌아가곤 했다. 그해 4월 파리에서 영성 수련을 마치면 우리 일행과 합류해 스페인 여행을 함께하기로 할 만큼 가까워졌다.

파리에서 내가 영성 수련을 강의하던 날, 최 목사님이 어서 끝내고 나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큰딸에게서 아빠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전화가 왔다고 했다. “엄마가 아빠를 꼭 봐야 하니 절대 산소호흡기를 떼지 말라”고 당부한 뒤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안에서 죽을 힘을 다해 기도했다. 살려 달라고, 안 된다면 두세 달 만이라도 살려 달라고, 아픔만 준 저 사람을 이대로 보낼 수 없으니 내가 간호라도 할 수 있도록 몇 개월이라도 살려달라고…. 그러나 그는 내가 도착한 다음 날 지구별을 떠났다.

왜 사랑은 이런 암흑 속에서 더 빛을 내는지…. 내 삶의 행보가 거칠고 힘겨웠어도 후회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자존심이 뭐라고 사랑한다는 말조차 건네지 못한 이 어리석은 사랑을 가슴이 무너지도록 후회했다.

정리=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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