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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문록] 오월이라는 이름


11살 사츠키의 동생 메이, 4살 소녀다. 아빠와 함께 시골의 낡은 집으로 이사 왔다. 엄마는 병원에 입원 중이다. 언니 사츠키를 따라다니며 늘 호기심 넘치는 메이는 엄마의 퇴원일을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새로운 농촌 생활에 유쾌하게 적응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도토리나무의 요정 토토로를 만난다. ‘이웃집 토토로’는 하도 유명해서 반려견인 나도 알고 있다. 벌써 30년은 더 됐으니 15살인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나온 영화지만, 우리 집에도 두 귀가 위로 쫑긋 서고 배가 유난히 크고 둥근 토토로 인형이 있었다. 나는 토토로 인형을 베개 삼아 잠을 자기도 하고 친구 삼아 놀기도 했다.

‘이웃집 토토로’의 메이는 사실 언니 사츠키의 복제판이다. 일본어 사츠키(皐月)와 영어 메이(May), 둘 다 5월을 뜻한다. 자매의 이름이 같은 뜻인 건, 영화를 기획할 때는 주인공 아이가 사츠키 한 명뿐이었는데 나중에 배역을 둘로 나눠 동생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강아지였다면 십중팔구 오월이와 시월이가 됐을 테지만, 영화감독들은 견주들이 반려견 이름을 짓는 것보다 더 신중하게 주인공 이름을 짓는 법이다.

인간 세상에는 진짜로 일어난 일들과 사람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혼재돼 있어서, 봄날 참나무와 소나무 꽃가루처럼 서로 뒤엉켜 붕붕 날아다닌다. 자칫하면 실제 이야기와 지어낸 이야기를 구분해내기 어렵다. 지어낸 이야기가 현실보다 더 그럴듯할 때도 있다. 내가 성견이 되면서 알게 된 것은 소설이나 영화처럼 사람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이야기들에는 그 사건이 일어나야 할 이유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또 다른 메이의 이야기가 그렇다. 예정일에 퇴원하지 못하는 엄마를 보기 위해 혼자 집을 나섰다가 길을 잃은 4살 소녀 메이가 아니라, 이번엔 비글종 개 메이의 이야기다. 메이는 2012년 10월에 태어난 복제견이다. 서울대 수의대 연구실이 그의 고향이다. 10월에 태어난 개 이름이 왜 하필 5월을 뜻하는 메이가 된 것일까. 연구자들은 이름을 짓는 데 영화감독만큼 신중하지 않은 모양이다. 복제견 메이는 2013년부터 인천국제공항에서 검역 탐지견으로 일했다. 사냥견의 피를 물려받은 잉글리쉬 스프링거 스파니엘이나 비글, 안내견으로도 유명한 래브라도 리트리버 같은 개들 중에서도 1년 넘게 엄격한 훈련을 받고 평가를 통과해야만 될 수 있다는 검역 탐지견. 나 같은 반려견들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5년간 무사히 마친 메이는 2018년에 은퇴했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서울대 동물실험실로 돌아갔다. ‘스마트탐지견’을 개발하려는 연구팀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험실의 메이는 토토로의 친구 메이의 이야기와 다르게 전개됐다. 사츠키의 동생 메이는 토토로의 도움으로 고양이 버스를 타고 가족 품으로 돌아왔지만, 실험실의 메이는 누구의 곁으로도 돌아오지 못했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죽기 전 모습만이 실험실의 메이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줄 뿐이다. 인간 세상의 현실에서는 마땅히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무심하거나 잔혹하게. 오월이다. 이웃집 토토로 소녀들의 계절이고, 모든 아이들의 계절이다. 강아지들이 가장 좋아하는 산책의 계절이다. 마땅한 이유 없이 복제견으로 태어나 그보다 더 마땅한 이유 없이 죽어야 했던 잔혹 동화 속 메이의 계절만큼은 이 땅에 그만 왔으면 싶다.

최현주 카피라이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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