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 경주에선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두 정상은 4시간 넘게 회담, 오찬, 산책 등을 했고 ‘한·미동맹과 한반도 평화에 관한 공동선언’도 채택했다. 회담은 격식 없는 노타이 차림으로 진행됐다. 적어도 바깥에서 보는 정상회담의 모양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어색한 상황은 공동기자회견에서 발생했다. 한국전쟁 종전 및 평화체제와 관련한 질문이 나오자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즉석에서 더욱 구체적인 입장을 내놓을 것을 요청했다. 이례적이었다. 그런데 부시 대통령은 “대통령님, 더 이상 명확히 말할 수 없습니다”고 잘라 말했다. 동맹국 정상들의 회담에 비춰볼 때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 회담 결과는 어땠을까. 두 정상은 미 재무부의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금융 제재 문제를 놓고 1시간 이상 격론을 벌였다. 6자회담 9·19 공동성명 도출 등 북핵 해결의 청사진을 제시하자마자 미국이 북한 돈세탁 우려를 들어 BDA의 북한 계좌를 동결한 게 원인이었다.

정부는 회담 직후 “정상 간에 이견이 없었다”고 했지만, 회담에 배석했던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훗날 “최악의 회담이었다”고 술회했다. 낙관론을 바탕으로 남북 관계 개선에 올인했던 한국의 대통령과 북한의 핵 포기 의지에 회의적이었던 미국 대통령 간 인식 차이를 그대로 노출한 사건이었다.

외교 활동에는 수사(修辭)를 뜻하는 레토릭(rhetoric)이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필수요소다. 국익을 걸고 나서는 담판이 덕담만 주고받는 것으로 끝날 순 없으니 각국의 외교 실무자들은 결과물을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이런 작업을 잘해야 능력 있는 외교관이라는 말도 듣는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워싱턴 정상회담은 실패한 회담이다. 핵심 의제인 비핵화 문제를 놓고 봤을 때 회담 결과는 좋을 수가 없었다. 기대를 걸었던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서로의 현격한 인식 차만 확인한 채 결렬된 만큼 중재자와 촉진자를 자처한 문 대통령의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회담을 앞두고 ‘굿 이너프 딜’ ‘얼리 하비스트’ ‘오퍼레이셔널 데피니션’ 등등 많은 아리송한 수식어를 쏟아내며 낙관론을 설파했다.

결과는 어땠나.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모 아니면 도식의 ‘빅딜(big deal)’을 고수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 문제에 대해선 “때가 아니다”고 일축했다. 제재 완화 문제에는 “제재가 계속 유지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가까운 시일 내에 3차 북·미 회담이 열릴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했다. 청와대는 회담 이후 “매우 허심탄회한 협의와 논의, 대화, 의견 교환”이라고 거듭 설명했다.

사실 정권의 명운을 건 북한을 대상으로 한 협상은 쉽지 않다. 북한은 제재 완화 없이는 비핵화에 나서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고, 미국은 빅딜 외에 해법은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섣부른 낙관론도, 도를 넘는 자신감도 자제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 정부가 끼어들거나 양측을 설득할 여지가 크지 않은 상황에서 실질적 성과 도출이 어렵다면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문재인정부의 비핵화 협상 접근법은 지나치게 장밋빛 전망에 매몰돼 있다. 조급하게 서두른다는 인상마저 준다.

최근 한반도 주변국 움직임이 바빠졌다. 북한은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가 합종연횡에 여념이 없다. 미국과 일본은 더욱 밀착하고, 중국 러시아는 협력을 부쩍 강화하고 있다. 중국 일본 역시 화해 무드가 역력하다. 문재인정부에는 비핵화 외에 다른 대외 현안도 산적해 있다. 한반도 주변국 어느 쪽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지와 협력을 받지 못해 외교적으로 고립된 현실은 레토릭이 상쇄할 수 없다.

남혁상 국제부장 hs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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