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효숙 (14) 가장 한국적인 맛으로 세계인 입맛 사로잡아

한국음식 맛있다는 찬사와 달리 밖에서 대접은 일본식당 선호해… 우리음식과 문화 알리는데 열정

2015년 5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엑스포. 강효숙 이사(왼쪽에서 네 번째)는 콩두 직원들과 일주일간 현지인들에게 한국음식을 소개했다.

남편의 장례식 후 정리를 마치고 수진이와 뉴욕에 머물려고 했다. 하지만 수진이는 엄마가 서울로 돌아가 엄마 일을 해야 자기가 편하다며 귀국을 종용했다. 뉴욕에는 큰딸 수현이와 사위가 될 남자친구도 있었다.

당시 나는 육촌동생 한윤주 사장의 모던 한식 레스토랑 ‘콩두’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홍콩에 거주할 때부터 사업차 서울을 찾으면 콩두에 들러 한 사장과 만남을 이어왔다. 어려서부터 창의적이던 동생은 갈 때마다 매번 “맞아, 바로 이 맛이야” 찬사가 절로 나오는 음식을 내놨다. 우리 어머니들의 고향이 이북인지라 음식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주는, 간이 세지 않은 음식을 대할 때마다 기억 속 그리움을 채워주는 보물을 만난 듯 감동했다.

해외에 살며 한국 문화와 음식이 일본의 위세에 눌려 숨도 못 쉬는 현실에 약 오르고 속상할 때가 많았다. 1980년대 중반 뉴욕 링컨센터에서 열린 일본의 가부키 공연은 전석 매진될 만큼 미국인을 사로잡았다. 일본의 대기업은 자국민 예술인을 후원하는 동시에 미국 내 예술단체에도 어마어마하게 기부를 하며 국력을 과시했다. 일본식 스시집에 가는 건 뉴요커에게 또 다른 문화를 접해보는 자랑거리였다. 가끔 디자이너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면 ‘한국음식이 어쩜 이리 맛있냐’는 찬사를 들었지만, 밖에서 대접하려면 다들 일본 식당을 선호했다.

한 사장은 1999년 대학 졸업 후 영국에서 타고난 손재주와 예술 감각을 살린 쥬얼리 디자인으로 성공했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우리 음식과 문화를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알릴지 고민했다. 요식업 경험은 없었지만 투지를 앞세워 2002년 서울 삼청동에 콩두를 열었다. 소중한 한식을 소개하고 싶어 열었으니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연구했겠는가. 뭐니 뭐니 해도 우리 민족 음식의 근간을 지켜온 온 것은 콩을 발효시킨 간장 된장 고추장이었다. 가장 한국적인 장의 근원인 콩은 누구나 쉽게 발음할 수 있었다. 식당 이름을 ‘콩두’로 정했다.

한 사장과 의기투합해 멋진 일을 해보고자 2008년 콩두에 합류했다. 콩두에선 정직하고 깊은 맛, 정갈하고 단아한 플레이팅으로 손님에게 행복한 시간을 안기고자 최선을 다한다. 주중 비즈니스 차 왔던 손님들이 부모님 모시고 다시 온다고 할 때는 우리의 정성과 노력이 보상받는 기분이다. 한번은 70대 중반의 여고 동창 어르신들이 예쁘게 멋을 내고 오셨다. 그중 한 분이 “굴비 한 마리를 온전히 내 몫으로 먹은 게 내 평생 처음이야. 고마워” 하시며 눈시울을 닦아내셨다. 춥고 배고픈 시대에 희생하며 살아온 우리 어머니들 모습에 코끝이 시려 왔다.

입소문이 나며 기업 행사의 케이터링(출장연회)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별화를 위해 행사의 목적과 콘셉트에 어울리는 음식, 그릇, 인테리어를 제공한 데 감명받은 분들이 많았다. 여러 기관의 요청으로 패션쇼, 국제 체육대회, 국제변호사대회, 다보스포럼, 밀라노엑스포, 모스크바 시민행사 등에 참여했다. 몸은 파김치가 됐어도, 그토록 소망하던 한국의 음식문화를 알리는 데 우리가 사용된 것이 참으로 감사했다.

2011년 10월 10일 경북 경주에서 열리던 유엔 세계관광기구(WTO) 행사 둘째날 밤. 행사가 끝난 뒤에 보니 큰딸로부터 6통의 다급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전화를 들었다.

“엄마! 수진이가 죽진 않았는데…” 그 길로 서울로 올라와 밤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날아갔다. 그 15시간은 내 삶에서 가장 두려웠던, 공포로 짓눌려 숨쉬기도 힘들었던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정리=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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