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효숙 (16) 소중한 딸 보듬고 서울로 돌아오다

보험회사, 요양원으로 옮겨달라… 아픈 딸 하루 2시간만 볼 수 없어

강효숙 콩두 이사(왼쪽)가 지난해 여름 간병인과 함께 딸 수진이를 데리고 경기도 남양주 한강변으로 산책을 가서 해바라기 꽃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수진이가 쓰러진 뒤 아픈 자녀를 데리고 사는 부모들에게 값싼 동정심을 보였던 내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깨달았다.

병원 생활 넉 달이 지나니 보험회사에서 병원치료비를 더 지급할 수 없다며 요양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곳에선 하루에 2시간만 면회할 수 있고 나머지는 모두 병원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어느 부모가 26세, 아직 펴보지도 못한 소중하고 예쁘고 아픈 딸을 하루 2시간밖에 보지 못하고 살 수 있겠는가.

내가 간호하기로 하고 집으로 데려왔다. 나를 돕기 위해 서울에서 뉴욕으로 달려온 친구와 둘이서 173㎝나 되는 아이를 매일 씻기고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일광욕을 시켰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른다. 엄마의 힘이었을 것이다.

병상의 수진이를 위해 기도해주신다고 많은 분이 오셨다. 그때 아픈 사람 찾아가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한 게 있다. 기도해주러 오신 건 고맙고 반가운데, 간혹 이런 얘기들을 했다. “수진이가 평소에 하나님을 잘 믿지 않았나 봐요.” 수진이가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뱉어낸 말인데, 이 때문에 수진이가 더 아팠겠구나 싶어 너무 미안했다. 환자의 보호자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자책하는 마음에 눌린다. 몸과 마음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도대체 이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일까, 왜 아픈 사람 앞에 와서 자기 믿음을 자랑할까 하는 맘이 들며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고 싶어졌다. 나는 그런 이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기도한다고 다녔겠구나’ 깊이 후회했다.

주위에서 도움의 손길을 구하기도 어려운 가운데 1년을 전전긍긍하며 버텼다. 하루는 병원에서 보험회사로 보내야 할 고지서가 착오로 우리 집으로 날아왔다. 2자 다음에 붙어있는 0을 세어보니 200만 달러, 한국 돈 20억원이 넘었다. 어마어마한 치료비에 풀썩 주저앉았다. 보험회사에서 지급한다고 해도, 그 천문학적인 숫자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2012년 11월 수진이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언니들이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수진이는 사고 후 처음으로 10분 정도 미소를 보였다. 언니들은 수진이가 이모들을 알아본다고 울고, 나는 미국에서 늘 노심초사했던 나처럼 녀석도 긴장했었구나 하는 마음에 안쓰러워 울었다. 내 나라, 내 땅이 주는 푸근함을 수진이도 안다는 확신이 들었다. 서울에 온 뒤 6개월 동안 한방, 민간요법, 마사지 테라피 등 사람들이 귀띔해주는 모든 것을 해봤다. 신촌세브란스병원과 로이병원을 오가며 재활도 받았다. 수진이를 환자로 살아가게 하기보다 평범한 일상을 누리게 하고 싶어서 자그마한 집을 장만했다. 1층은 수진이 공간, 2층은 주방 겸 식당, 3층은 나의 공간이다.

수진이는 턱과 입안의 근육이 경직돼 입으로 먹지 못한다. 대신 위장으로 직접 연결되는 튜브를 통해 영양을 공급받는다. 수진이를 6년째 쭉 돌봐주시는 간병인 이모님 두 분이 계시다. 나처럼 모두 남편을 떠나보냈다. 세 명의 과부와 한 명의 꽃다운 청춘이 살아가는 집에선 매일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일상생활을 하며 편안해지는 수진이의 표정 변화에 우리는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동대문시장으로 구경도 가고 인사동으로 산책도 가고 영화도 보러 가며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간다.

뉴욕에선 내가 없으면 절대로 이 아이를 돌볼 수 없을 것 같아 지쳤고 사람들 때문에 마음의 상처도 입었다. 이 모든 것을 말끔히 치유해주신 이모님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는 또 다른 기쁨이다. 아픈 자녀와 살면서 느끼는 기쁨과 슬픔과 사랑의 깊이는 아주 깊고 강력하다.

정리=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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