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6월 중국 충칭에서 결성된 한국혁명여성동맹의 창립 기념 단체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가족이 참여했다.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제공

1만5511명 중 432명. 비중이 3%도 채 되지 않는 이 숫자는 전체 독립유공 포상자 가운데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다. 이마저도 올해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여성 독립유공자 75명이 추가된 것이다. 지금까지 독립운동에 나선 여성들을 조명하는 시각은 남성 운동가를 뒷바라지한 역할로 평가한 데 머무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이처럼 보조적 수단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묻혀 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새롭게 찾아내고, 기존과 다른 접근 방식으로 그들의 활동을 재조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역사문화원이 지난해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 포상 확대 방안 연구’ 보고서를 보면 그동안 여성 독립유공자 포상이 어려웠던 이유로 우선 이들의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할 판결문이나 보도기사와 같은 증빙자료가 아예 없거나 부족하다는 점이 꼽힌다. 일례로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성녀(1881∼1954) 여사는 오빠의 하얼빈 의거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 등에서 지내며 군복이나 식량 지원 등으로 독립군을 도왔으나 공적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충분치 않아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인식의 문제도 지적된다. 남성이 하는 독립운동에 여성이 아내 또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참여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여성 운동가 발굴에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여성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사람 자체가 적다는 문제도 있다. 대표적 연구자인 박용옥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고령(84세)이어서 빨리 후임 연구자들이 전면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보고서는 또 연구자들이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연구사업(여성독립운동사 등 관련)이 거의 없어 연구의 발전이 어렵고 연구인력도 양성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양육·집안일에 가려진 여성 운동가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이 6일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 인근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윤성호 기자

최초의 여성 의병장, 국내외 독립운동가 등 여성 독립유공자 발굴에 적극 나서고 있는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심옥주 소장을 6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심 소장은 2011년 부산대에서 윤희순의 의병 활동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2013년 동의대에서 도산 안창호의 정치철학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는 그가 2009년 부산대 조교수로 있을 때 만들었다.

심 소장은 여성 독립운동가 연구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성 유공자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현상’에 치중해 있었다. 아이 양육이나 집안일을 하는 사람으로 접근하다보니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무게를 두지 못했다”며 “여성이지만 국가를 위해 뭘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했던 당시 여성들의 역사를 찾아가는 게 곧 우리 역사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심옥주 소장이 곧 출간하는 ‘여성 독립운동가 인명록’ 표지.

특히 심 소장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몇 명이나 발굴하는지 숫자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일생을 전반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여성 독립운동가 인명록’ 출간을 앞두고 있는 그는 “지역 등 분야별로 대표성을 갖는 분들을 추려서 우선 100명을 인명록에 넣었고, 다음에 또 100명씩 추가해서 계속 인명록을 만들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국경을 넘어 독립운동을 한 여성들

심 소장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여성들이 아직 많이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게 아쉽다”며 제대로 조명받아야 할 3인을 꼽았다.

김마리아 여사는 일본과 중국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국가보훈처 제공

김마리아(1892~1944) 여사는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모교 교원으로 있다가 1914년 일본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동경여자유학생 친목회’를 조직해 학생들을 결집했다. 1919년 귀국해 각지를 돌며 독립사상을 고취했고 2·8 독립선언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1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황해도 대의사(代議士), 상하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를 역임했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근화회(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귀국 후에는 신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여생을 기독교 전도와 신학 연구로 보냈다.

이혜련 여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내로서 내조에 그치지 않고 미주 여성단체에 참여하며 독립의연금 조달에 힘썼다. 국가보훈처 제공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1884~1969) 여사는 남편의 활동을 도우며 미주 지역 부인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1919년 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직된 부인친애회에 참여했고, 같은 해 8월 캘리포니아 중부 디누바에서 조직된 대한여자애국단에 부인친애회 대표로 참가했다. 흥사단의 단기로 사용된 깃발은 이 여사가 직접 수를 놓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여성단체를 통해 독립의연금 모금에 앞장섰고, 남편이 미주를 떠나 독립운동을 펼치는 동안 백인 가정의 집안일을 해주고 과일가게를 운영하며 가사를 책임졌다. 1938년 남편이 서거한 뒤 홀로 5남매를 키우며 재미한인사회의 존경을 받았다.

안창호 선생의 조카인 안맥결 여사는 만삭의 몸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안창호 선생의 조카 안맥결(1901~1976) 여사는 1919년 10월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 중 일제의 시정기념일 만세시위에 나섰다가 붙잡혀 20일간 구금됐다. 1925년에는 중국 난징에서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가입했고, 귀국 후 수양동우회에 참여해 활동하다 1937년 서울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만삭의 몸으로 옥고를 치렀지만 한 달여 만에 가석방됐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하다가 지난해 정부가 기준을 일부 완화한 뒤에야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심 소장은 여성 독립유공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센터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여성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기념탑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에 여성 독립유공자 동상은 6개뿐”이라며 “한 인물만 상징적으로 기리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여성 운동가들을 기리는 탑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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