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여운학 (2) 이웃 돌보기와 정직함을 실천하신 어머니

춘궁기에 굶어 죽는 사람들 많아 봄 되면 나락을 가져온 나물만큼 내줘…형 덕에 세계동화·위인 전집 읽어

규장문화사 설립자인 여운학 303비전성경암송학교장이 1983년 노모와 함께 서울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아침 공복에 냉수를 마시고 있다. 덕분에 80평생 설사나 변비를 모르고 산다.

어머니는 학교 문턱을 넘어본 적이 없는 분이지만 정직한 삶과 이웃을 돌보는 삶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당시 일제에 나락을 공출하다 보니 춘궁기만 되면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어머니는 내 키만 한 큰 독 3개를 뜨락에 놓고 가을마다 잘 말린 나락을 가득 채웠다. 봄이 되면 면 소재지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 가난한 이들이 산나물과 들나물을 뜯어 우리 집으로 이고 왔다.

어머니는 공짜로 나락을 주지 않았다. 대신 나물에 비례해 나락을 내줬다. 집안에 쌓인 나물은 동네 사람들에게 무료로 골고루 나눠줬다. 지금도 생생한 것은 어머니가 준 나락을 받아 머리에 이고 가던 아낙네들의 얼굴에 번진 환한 미소다.

영동 학산초등학교에 다닐 때 세계동화전집, 세계위인전집 등 일본어 양장본 시리즈를 제법 많이 읽었다. 서울 휘문중학교에 다녔던 형 덕분이었다.

형은 공부보다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늦둥이로 얻은 아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총각 선생님을 사랑방에 모셔놓고 개인 가정교사로 삼았다. 그러나 가르치고자 하는 아들은 놀기를 좋아했고 또래 친척들과 동네 친구들만 그 혜택을 입었다.

형은 중학교 때 애국적인 훌륭한 선생님들 밑에서 학교수업보다 나라사랑 정신교육을 많이 받았다. 특히 아우인 나를 끔찍이 사랑했다. 방학 때면 좋은 어린이전집을 선물로 가져왔다.

“운학아, 여기 세계위인전집 좀 읽어봐라. 너한테 도움이 될 것이다.” “와, 형 고마워.” 형의 보살핌 덕에 서점 하나 없는 촌동네에서 세계위인전집과 세계동화전집을 섭렵할 수 있었다.

매주 월요일 500여명의 전교생 앞에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각 반에서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나가서 발표했는데, 다들 시골 사랑방이나 할머니한테 들은 호랑이 담배 피우는 이야기, 소금장수 이야기만 했다. 반면 나는 서투른 표현이긴 했지만, 세계적인 동화나 위인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 보니 반을 대표해서 제법 많이 발표자로 섰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8·15광복을 맞았다. 나는 무엇보다 학생 각자에게 의무적으로 할당된 퇴비용 칡넝쿨과 산풀 채집에서 해방된 게 좋았다. 매주 두 번 있는 검도 시간이 없어진 것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목검을 들고 마주 보고 섰던 내 짝이 원숭이를 닮은 데다가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웃기곤 했다. “네 이놈, 딱!” 그 바람에 일본인 선생한테 목검으로 머리를 얻어맞는 고통이 사라진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충북의 명문인 청주중학교에 원서를 냈다. 당시는 미군정의 영향으로 9월에 신학기가 시작되고 7월에 입학시험이 있던 시절이었다. 마침 그때 무릎을 다쳤던 나는 걸음 걷기가 힘들었고 큰 장마로 조치원에서 청주까지 경부선 철로가 떠내려가 부득이 걸어서 가야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영동농업중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원하지 않는 학교에 진학해 1학년부터 ‘인생이 무엇이냐’며 나름 심각한 니힐리즘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자존심을 살리려고 손문의 ‘중국혁명사’를 읽었다. 담임선생님이 국사를 가르치셨는데 선생님을 테스트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한편으론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오기였다. “운학아, 네가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책을 읽고 있니. 아주 훌륭하구나.”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나를 칭찬하셨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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