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사장은 서울 지하철 사당역 복권 판매소 앞 노상 장기판의 고수다. 광역버스 환승정류장의 긴 줄을 따라 유흥가가 늘어선 이 길에서 밝은 빛을 받지 못하고 옹색하게 펼쳐지는 장기판은 언제나 열 남짓의 행인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중 절반은 곧 지나갈 구경꾼, 나머지 절반은 성가신 훈수꾼이다. 훈수꾼 중 한둘은 호기를 부린다. 최 사장은 볼품없는 기력으로 덤비는 도전자를 번번이 속기로 몰아붙여 혼쭐을 낸다. 때때로 5분을 넘기지 않고 외통을 치는 최 사장의 대국은 묘기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그의 대국은 유독 많은 구경꾼의 발길을 잡는다. 무엇보다 강력한 그의 힘은 기물(장기알)에 숨을 불어넣는 ‘스토리텔링’에 있다.

최 사장은 초한전쟁 전후사를 꿰찼다. 궁에 ‘장(將)’과 ‘수(帥)’를 새겨 넣는 중국의 샹치와 다르게 ‘초(楚)’와 ‘한(漢)’으로 진영을 구분하는 한국식 장기는 초한전쟁의 마지막 장인 해하전투를 재현하고 있다. 최 사장은 기물에 장수의 이름을 적절하게 골라 붙여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의 입에서 기물은 말 탄 장수가 되고, 장기판은 병참이 된다.

하수의 대국 초반 수는 뻔하다. 좌·우변을 지키는 병졸(兵卒)을 옆으로 옮겨 차(車)의 길을 열고, 성 앞줄 한쪽 귀에 마(馬)를 올린 뒤 포(包)로 궁 앞을 방어하는 귀마면포로 농성을 벌인다. 이때 특별한 목적도 없이 상(象)을 본진의 병졸 사이로 올려 기물 간 맞교환을 제안하는 하수의 버림수가 나오면 최 사장은 혀를 차며 입을 열기 시작한다. “이 친구야. 상을 버리자고? 자네의 상은 이 판을 끝낼 때 한신이 돼 있을 거야.” 한신은 초왕 항우를 섬겼지만 천한 신분 탓에 요직에 오르지 못하고 한왕 유방의 휘하로 들어가 개국공신이 된 장수다. 유방이 항우를 사면초가로 몰아세울 때 북방에서 진격한 승장이지만 한 왕조에서 팽을 당했다. 버림수에 내몰린 상을 설명할 때 한신보다 적합한 인물은 없을 것이다.

맞교환을 거부당하고 갈 길을 잃은 하수의 상은 대체로 행마(기물의 이동)가 정해져 있다. 적진의 병졸 하나를 잡고 그 옆의 병졸에게 붙잡혀 죽을 운명에 놓인다. 하수는 그럴싸한 핑계를 댄다. ‘적진의 대열을 흔들고 병졸을 먹었으니 손해날 게 없겠지.’ 하지만 상대가 최 사장이라면 다르다. 상은 샹치에서 본진을 벗어날 수 없는 방어용 기물로 설계돼 있다. 최 사장은 샹치의 방식으로 상을 활용한다. 본진으로 들어온 하수의 마·포·차를 붙잡는 건 결국 최 사장의 상이다.

“거봐. 내가 뭐랬어. 한신이 자네의 계략을 나에게 밀고했다고.” 최 사장은 상을 일찍 버리고 마·포·차로 승부를 내보겠다는 하수의 얕은수를 한신의 배신으로 묘사하곤 했다. 하수의 마를 모두 잡을 때쯤, 최 사장의 입에서 항우의 희로애락이 요동친다. “범증을 제거했으니 초는 풍전등화고, 자네는 이제 우미인과 해하가를 부르게.” 범증은 초의 맹장, 우미인은 항우의 연인 우희다. 해하가는 영화 ‘패왕별희’에서 극중극으로 다뤄졌던 항우와 우희의 이별가를 말한다.

최 사장의 입에서 해하가가 나왔다는 것은 십중팔구로 초의 멸망이 다가왔다는 뜻이다. 이때 하수는 궁의 방패막이로 결지를 받아낸 사(士)를 성 앞줄로 올리고, 듬성듬성 비워진 본진에서 남은 병졸을 모아 최후의 일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장기판을 에워싼 모두가 알고 있다. 승부는 이미 최 사장 쪽으로 기울었다. 하수의 발버둥은 항우의 최후와 닮았다.

항우는 해하전투에서 패퇴를 거듭해 대군 10만명을 잃고 남은 기마병 28기 앞에서도 하늘을 탓했다. 휘하의 장수였던 한신·팽월의 칼끝이 결국 자신의 목으로 겨눠진 이유를, 퇴각로에서 농부의 거짓말로 길을 잘못 들어 유방에게 다시 붙잡힌 이유를 몰랐다. 자신을 지지해 거병한 장수를 외면했고, 앞선 진(秦)과의 거록대전에서 승리하고 붙잡은 포로를 몰살했다. 난세의 민심은 혼란스러웠지만 항우를 지지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했다.

최 사장은 장기판을 떠나며 기력을 묻는 하수에게 말한다. “장수와 병졸을 아껴 써.” 해하전투 전까지 모두 승리한 만인지적의 패왕 항우가 유일하게 얻지 못한 것은 인심이었다. 대의를 꿈꾸면서 인재와 민심을 가볍게 여긴 그는 하수였다. 그러니 2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장기판에서 하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아닐까.


김철오 온라인뉴스부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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